조선시대 '목판'은 가문의 영광이었다
[아시아경제 오진희 기자] 조선시대 유교사회에서 '목판(木板)'은 선대 사람들이 후세에 지식을 전하기 위한 지혜의 보고였다. 책을 시장에 유통하기 위한 인쇄술이 아닌, 선비 층에서 가문의 영광이자 자랑으로 여긴 귀중품이었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물인 신라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처럼 목판은 고대부터 이용돼 온 기술이다. 하지만 조선시대로 와서는 '목판' 그 자체가 따로 보관될 정도였는데, 당시 목판이 양반계층들을 중심으로 한 집단지성의 산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한 선비 집안의 문집 판각 과정에 유림(儒林)의 승인을 얻어야 하는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였다. 유림의 승인은 보통 서원이나 향교를 통해 통문을 돌려 의견 모았다. 혈연과 학연 중심의 유교적 문화네트워크가 형성돼 왔음을 목판을 통해서도 짐작해 볼 수 있다.
주로 문중과 서원 등 민간에서 이어져 내려왔던 목판은 현재 안동에 있는 한국국학진흥원에서 기탁을 받아 지난 2월 유교책판 718종 6만4226장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위한 국내 후보로 확정되기도 했다. 진흥원은 또 목판 10만장을 수용할 수 있는 장판각(藏板閣)도 건립한 바 있다.
문중, 종택, 서원 등에서 보관돼 왔던 유교 책판과 함께 목판은 천자문·오륜행실도·논어·중국고금역대연혁지도 등 당시 교과서 용도의 책들을 찍어내기도 했다. 더불어 건물의 편액이나 다식판, 떡살 등 일상생활에서도 활용됐다.
이 같은 조선시대 목판을 두루 살펴볼 수 있는 전시가 서울 경복궁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안동에 있는 한국국학진흥원과 박물관이 공동으로 기획한 '목판, 지식의 숲을 거닐다'전이다. 전시장 내부에는 마치 기록이나 문집을 인출한 판을 보관했던 장소인 장판각과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문집(文集)·족보(族譜)·지리지(地理誌)·의서(醫書) 등의 목판과 책이 펼쳐져 있으며 이 가운데 '대동운부군옥' 목판(보물 제878호) 등 책판을 비롯해 포은 정몽주(鄭夢周 1337?1392년) 영정, 괴담(槐潭) 배상열(裵相說 1759?1789년)이 제작한 혼천의, 일제강점기 때 일본식 화로의 바깥 면을 보호하는 용도로 바뀌어버린 오륜행실도 등을 찍어낸 목판, '도산서원 현판', '능화판' 같은 생활목판 등 총 250여 점을 만나볼 수 있다.
이 중엔 기록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보여줬던 퇴계 이황의 문집을 간행하기 위한 초고본 부터 교정본도 볼 수 있다. 조선의 14대 임금인 선조(1567~1608년)는 "퇴계의 저서는 한 마디 한 글자가 모두 후세에 전할 만한 것이기 때문에 만약 흩어져 없어지기라도 한다면 후회가 될 것"이라고 하면서 목판으로 새기도록 했었다.
이와 함께 조선 후기 책의 간행 과정과 비용 등을 알 수 있는 '간소일기'(刊所日記)를 비롯, 도산서원에서 책을 간행하기 위해 오늘날의 간행위원회처럼 임원명단을 기록한 '파록'(爬錄), 물품사용 내역과 비용을 적은 '하기'(下記), 책의 배포 목록인 '반책기'(頒冊記)도 소개돼 있다.
이 전시에선 특별히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 106호 김각한 각자장이 훈민정음과 동몽선습 등을 목판에 새기고 인출(印出)하는 시연을 매주 수, 금, 일요일에 진행하고 있다. 오용원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박물관 전시팀장은 "조선시대 각수 중에는 승려가 많았고 속인도 있었다. 이들에 대한 대우는 대단했다. 최고의 각수를 '도각수'라고 하는데 이런 이들은 전국적으로 활동했고, 사업지마다 스카우트를 해갈 정도였다"며 "진흥원에서 조선시대 각수의 맥이 언제, 누구까지 진행됐었는지 조사·연구해 '각수 사전'을 만들 계획"이라고 말했다. 일제침략과 한국전쟁 때 화재와 도난으로 목판이 상당수 사라지게 되면서, 근대화 물결에 따라 각수의 맥도 끊긴 것이다. 오늘에 이르러 다시 오옥진, 김각한 등 각자장들이 목판 서각을 부활시키며 전승하고 있다. 6월 23일까지. 02-3704-3060.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