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일이 예사롭지 않은 건 해명 과정에서 드러난 두 사람의 속마음 때문이다. 이들의 해명에는 '내보내고 싶은 이 총재'와 '버티고 싶은 박 부총재'의 심경이 그대로 녹아있다. 이 총재 내정 당시부터 예견된 일이지만, 환부가 열려 갈등은 더 깊어졌다.
말의 홍수 속에서 직원들은 이 총재 취임 직후 박 부총재가 스스로 물러날 것으로 내다봤다. 하지만 좀체 그런 움직임이 포착되지 않으면서 손발 안 맞는 총재와 부총재의 동거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한은 내부망 '발전참여방'에 올라온 글들을 보면 여론의 향배가 짐작된다.
이달 초 한 직원은 '효경(孝經)'의 '회총시위(懷寵尸位)'를 언급한 글을 올렸다. 임금의 총애를 받다 물러나야 할 때 물러나지 않았던 벼슬아치가 끝내 화를 당한다는 내용이다. 김 전 총재 시절 승승장구했던 박 부총재 와 일부 부총재보들의 동반 퇴진을 요구하는 목소리였다.
박 부총재는 본인의 거취를 둘러싼 풍문에도 동요하지 않았다. 지난 3일 테니스장에서 전화 인터뷰에 응한 박 부총재는 "내가 거취를 표명할 거라는 얘기는 금시초문이며, 소문의 진원지가 된 언론사와 전화 한 통 한 일이 없다"고 강조했지만, 접촉이 없었다는 발언은 사실과 달랐다.
박 부총재는 또 "도대체 누가 내 마음에 들어와 본 듯 말을 하고 다니느냐? 왜 그런 말이 나오는건지 알 수가 없다"고 말했다. '법이 정한 임기가 1년 남았다'는 점을 환기하자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라면서 상대적 열세라는 위치를 부각했다.
정통 인사 라인을 거쳐 '정치 9단'으로 꼽히는 박 부총재가 무방비 상태로 풍문에 노출됐다 여기는 직원은 드물다. 한 중견 간부는 "박 부총재의 해명은 결국 '나갈 뜻은 없지만 자꾸 나가라는 압력이 들어온다'는 것 아니겠느냐"면서 "언론을 통해 여론의 향배를 가늠해보려는 의도도 담긴 것 같다"고 풀이했다.
이 총재도 박 부총재 만큼이나 속내가 복잡하긴 마찬가지다. 박 부총재의 거취 표명설이 나돌 당시 카자흐스탄 아시아개발은행(ADB) 연차총회 출장 중이었던 이 총재는 동행한 기자들에게 "확인해보라고 했더니, 들은 바로는 '부총재가 사의를 표명한 건 사실이 아니다'라고 부인한 걸로 안다"는 묘한 해명을 했다.
부총재는 대통령이 임명하지만, 총재의 추천 과정을 거친다. 한은의 최고 수장이 부총재의 사의 여부를 타인을 통해 확인한다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 애매한 발언은 이 총재의 조심스러운 입장을 보여준다. 국가적 재난에 가까운 세월호 참사 속에 공공기관에서 잡음이 이는 모양새가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이 총재는 그러면서도 박 부총재의 결단을 바라는 듯한 언급을 덧붙였다. 그는 "임기가 있으니 원칙적으로 임기를 지키는 것이 맞다"면서도 "그 전에도 보면 임기 중에도 자리가 있으면 나가기도 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는 대부분 임기를 다 존중해줬다"는 단서를 달았지만, 방점이 찍히는 건 역시 "나가기도"라는 부분이다.
이 총재의 말은 '원칙적으로 임기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주는 게 맞지만, 사정에 따라 예외도 있을 수 있다'는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두 사람 사이의 기싸움은 결국 이 총재가 '평판 리스크'를 얼마나 끌어안을 각오가 돼 있느냐에 따라 결판이 날 것으로 보인다.
상황을 관전 중인 직원들의 의견은 "박 부총재 등의 자진 사퇴를 통해 인사 잡음이 하루빨리 잦아들길 바란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임기 도중 사퇴에 따른 나쁜 전례"를 염려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임기가 방패가 돼선 안 된다는 게 다수의 의견이다.
한 직원은 "정통 한은맨 출신인 신임 총재가 성과를 내야 후배들에게도 길이 열리고, 한은도 발전하는 것 아니겠느냐"면서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아 출발함이 옳다는 게 밑바닥 민심"이라고 귀띔했다.
박연미 기자 chang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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