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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자작업장학교의 조금 특별한 졸업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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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생 7명 모두 논문 발표…'내가 할 수 있는 건 뭔가' 해답 찾기…대안학교서 배운 건 '세상 보는 눈'

[아시아경제 이윤주 기자] '축(祝)졸업'이라고 쓰인 큼지막한 플래카드도, 휘황하게 늘어선 꽃다발도 찾아보기 힘들다. 서울 영등포구에 위치한 '하자작업장학교'의 졸업식에 주인공으로 선 일곱 명은 편안한 셔츠와 바지 차림으로, 저마다 준비한 논문을 발표했다. 학교를 다니며 죽돌('친구'를 가리키는 말)과 판돌('판'을 벌여주는 교사)의 도움으로 배우고 느낀 것을 에세이 형태로 풀어냈다. 내용이 가볍지는 않다. 그들은 '세계시민'이라는 단어를 쓰고 '반핵'과 '탈핵'을 구별하며 '문명의 회복'을 고민한다. 불긋한 여드름과 뽀얀 솜털이 내려앉은 뺨은 영락없는 소년, 소녀인 그들을 '조금 특별한' 졸업생으로 만든 것은 무엇일까.

◆교육기관을 넘어선 공동체= 지난 1일 하자작업장학교 졸업식에서 선호(김재욱), 미난(배민환), 온(최하은), 주님(김해주)을 만났다. 이곳에서는 학생과 교사, 선배와 후배를 가리지 않고 모두가 보다 수평적인 관계에서 소통하기 위해 닉네임을 부른다. '졸업하는데 기분이 어떤가' 물었더니 이들은 "실감이 나지 않는다"면서도 차분하게, 이따금 낭랑한 폭소를 터뜨리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주님은 학교에 대해 "프로그램 대부분이 공동작업"이라며 "배운 내용을 대화를 통해 끊임없이 나누고 다음 작업도 같이 기획한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형태의 배움에서 '누가 더 잘하나'는 의미가 없다. 공동의 노력을 거친 결과물은 하나로 수렴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곳은 등·하교하는 개념을 넘어선 공동체이자 일상"이라고 말했다.

하자작업장학교의 조금 특별한 졸업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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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시민'과 '크리킨디'= 소극장을 연상케 하는 공간 앞쪽에 무대가 있고 일곱 개의 좌석이 놓였다. 객석에는 줄을 맞춘 의자 대신, 사람들이 신발을 벗고 다리를 펴거나 포개고 앉을 수 있는 자리가 깔려 있다. 이번 졸업식의 주제는 '시대의 인연'. 배움의 여정에서 만난 일곱 가지 화두가 차례로 펼쳐졌다.
일곱 가지 화두를 가로지르는 건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다. 이들이 입학하자마자 터진 이 참사는 이들의 3년을 지배하게 된다. 미난은 "우리가 꿈꾸는 건 '탈핵(beyond nukes)' 사회다. '반핵(no nukes)'이 단순히 핵을 반대하는 것이라면 '탈핵'은 핵에너지로 움직이는 문명에서 벗어나 완전히 다른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들은 후쿠시마 사고 후 100일이 될 즈음 '탈핵문화제'를 준비했고, 이후 매년 3월을 '후쿠시마를 기억하는 달'로 정해 서울광장에서 추모행사를 열었다. 선호는 "사라진 것을 추모하고, 무엇을 소중히 해야 하는지 깨닫는 시간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이 찾아낸 키워드가 '크리킨디'다. 크리킨디는 숲에 불이 나 다른 동물들이 죄다 도망갈 때 작은 부리로 물을 한 모금씩 길어 산불을 끈다는 벌새다. 공동체의 결과를 바꾸는 일에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것'을 보탠다는 의미란다. 미난은 "'세계시민'으로 살면서 뭐라도 해야지 않나. 그런 의미에서 영감을 준 게 크리킨디"라고 말했다. 세계시민이라는 일견 거대한 개념에 작은 부분부터 접근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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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중력청소년, 지구에 발 딛다= 졸업을 축하하러 온 수료생 '마'(21·여)를 만났다. 그는 고등학교를 자퇴했다. 제도교육에 불만이 있던 건 아니었고 개인적인 문제였다. 시스템의 부조리를 인식한 건 한참 후였다고 했다. 하자작업장학교에 입학하기 전 '유자살롱'을 1년간 다녔다. 유자살롱은 밴드음악을 통해 청소년에게 필요한 커뮤니티를 만드는 사회적 기업으로 하자센터 네트워크의 하나다. 그는 "홀로 있는 것에만 익숙한 친구들을 여기서는 '무중력청소년'이라고 부른다"고 말했다. 유자살롱은 부유하는 그들의 마음을 음악을 통해 땅 위로 끌어내리는 곳이다. '중력을 찾았냐'고 물었더니 "찾았다"며 웃었다. 그리고는 "음악 이전에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라고 덧붙였다. 유자살롱에 이어 작업장학교를 선택한 이유도 흥미로웠다. "유자살롱의 '유자'는 '유유자적'의 줄임말이다. 느슨하고 여유롭다. 일단 중력을 찾는 게 우선이니까. 반면 작업장학교는 슬로건 자체가 뚜렷한 만큼 일정이 촘촘하다. 지금까지 슬슬 살았으니까 한번 치열하게 지내보고 싶었다."

◆"고향으로 돌아가 나무집 지을 것"= 이제 '크리킨디'가 되어 새로운 세상 속으로 날아가는 그들은 어떤 미래를 그릴까. 선호는 "고향에 내려가 목수이신 아버지를 도와 집을 지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미 작업장학교에서 목조주택을 짓는 수업을 거쳤단다. 그는 빨간 지붕이 얹힌 작은 건물을 가리키며 "우리들이 지은 것!"이라고 외쳤다.
주님은 "고향에도 학교를 중심으로 마을공동체를 표방하는 대안학교가 있다"며 "돌아가서 농사를 비롯해 마을의 이런저런 일을 배우고 사람들과 가깝게 지내고 싶다"고 말했다. 온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데 학교 일정이 빡빡해 많이 못 그렸다. 졸업하면 실컷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말했다. 그의 목덜미에 그려진 타투가 눈에 들어왔다. 관심을 보이자 "진짜가 아니라 스티커"라며 웃었다. 그러자 지켜보던 미난이 들뜬 목소리로 "실은 올해 계획 중 하나가 타투를 하는 것"이라며 끼어들었다. "'크리미널 타투'라고, 러시아 교도소의 수감자들이 특별한 도구가 없어 침대 스프링과 잉크만으로 한 땀 한 땀 손으로 한 데서 유래했다"고 설명하는 그의 눈에 천진한 젊음이 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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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아픈 곳을 외면할 수 없다"= 졸업식을 지켜본 조한혜정 초대 교장은 "입학하자마자 후쿠시마 사태를 직면한 이번 졸업생들은 누구보다 열심히 시대를 공부했다"며 "우정과 환대의 마을을 만들며 세상을 낫게 할 거라 믿는다"고 축사했다. 김희옥 교장은 "아이들을 세상의 너무 아픈 곳에 데리고 다녀 미안하다"며 "3년의 격랑으로 마음에 '근육'이 생겨난 것을 느끼며 서로를 지탱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하자작업장학교를 경험한 이들은 그곳에서 이뤄지는 활동이 결코 수월하지 않다고 말했다. 대안학교라고 해서 자유롭게 개인의 시간을 운용하는 생활을 연상할 수 있지만 실상은 크게 다르다. 스케줄 자체도 그렇지만 사회의 다양한 현상에 기민하게 반응하고 그것의 본질을 이해하는 과정은 상당한 '학습'을 요한다. 힘들 땐 서로 토로한다. '힘들면 그만둘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물었더니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역할'이 있음을 느끼게 됐다"고 그들은 입을 모았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그들은 단어를 선택하는 데 상당히 민감하다. 일상에서 흔히 쓰이는 단어라도 더 적절한 표현이 있다면 얼른 고쳐 말한다. 기자가 무심코 쓰는 어휘를 두고도 '그것보다는 이게 더 정확할 것 같다'고 지적해낸다. 언어는 한 인간이 세계와 교감하는 채널이라는 점에서, 스무 살 언저리에 그것을 섬세하게 분별해내려는 그들의 앞날이 퍽 기대됐다.

▲하자작업장학교는?
1999년 12월 개관한 하자센터(서울시립청소년직업체험센터)의 네트워크 중 하나. 하자센터는 연세대학교가 서울시로부터 위탁 운영하고 있으며, 창의적 삶의 지속 가능성을 추구하고 청소년 스스로 자립을 모색하는 교육 생태계를 조성하고 있다. 2001년 개교한 하자작업장학교는 대표적인 비인가 도시형 대안학교로 청소년들이 우리 사회의 성숙한 시민이자 창의적 공공작업자로 성장해갈 수 있도록 한다.




이윤주 기자 sayyunju@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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