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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 끝난 신문사 편집국에 몰려 온 공무원들 한다는 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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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후기] 강남구청 '집단 왕따' 사건

[아시아경제 김봉수 기자]지난 16일 오후. 이제 막 석간 신문 발행을 마친 후 점심 식사의 노곤한 뒤끝을 즐기고 있던 충무로 아시아경제신문사 건물 10층 편집국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강남구청 주 모 부구청장 직무대리를 포함한 몇몇 공무원들의 방문 때문이었다. 이들은 돌연 신문사 편집국에 들이 닥쳐 이날자 신문 사회면 톱으로 실린 기사를 온라인에서 삭제해달라고 사정했다.
이들은 그러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이들은 심지어 출입처에 나가 있느라 부재 중이어서 만나지 못한 취재 기자에게 까지 전화를 걸어 "기사를 내려달라. 아니면 제목이라도 좀 바꿔달라"고 사정했다가 "그럴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는 면박만 받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사건의 시작은 2010년 신연희 현 강남구청장의 취임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강남구청 소속 4급 공무원(국장급)인 이모(60)씨는 요직이란 요직은 다 섭렵한, 주변으로부터 능력을 인정받고 있는 공무원이었지만 신 청장의 취임 이후 '전임 구청장의 측근'이라는 이유로 30년간 근무한 강남구청을 떠나 파견 근무를 가게 된다.
본래 파견 근무는 1년만 하는 게 관례지만, 이씨만 유독 2년 동안 파견 근무하라는 지시를 받을 때 부터 이상했다. 이씨는 그때까지만 해도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 보장이라는 원칙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현실이 그렇지'라는 마음으로 참았다. 몇 년 안 남은 정년을 고향같은 강남구청으로 돌아가 채울 수 있을 것이라며 위안을 삼았다. 하지만 금천구청에서 2년간 파견 근무를 하던 도중 문제가 발생했다.

한 후배 공무원이 갑자기 찾아와 "후배들을 위해 길을 열어달라"며 명예퇴직을 요구하는 것이다. 응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아들ㆍ딸이 다 학교를 다니고 있는 처지라 그러지도 못했다. 그랬더니 갑자기 본인 동의도 없이 서울시 전출 지시가 내려왔다. 이해할 수 없기에 불복해 인사 소청을 제기했다. 승소해 강남구로 돌아왔더니 이후엔 또 다시 개인정보보호위원회로 1년간 파견 가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3년간 유랑을 한 끝에 지난해 3월 정년을 2년 2개월 앞두고 파견을 마치고 강남구청으로 돌아왔지만, 이때부터 그의 고난은 강도를 더했다. 구청에서 사무실이나 책상ㆍ컴퓨터 등 업무에 필요한 것을 아무 것도 내주지 않았다. "그냥 집에 가서 계시라"는 말만 돌아왔다.

이로 인해 이씨는 현재 10개월이 넘게 집에서 이른바 '재택 근무'를 하고 있다. 하는 일이 없어 오갈 데 없는 백수 신세나 마찬가지다. 아내는 남편이 보기 싫다며 아침을 차려 준 후 외출해 버리고, 기르고 있는 개와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고 놀아 주면서 시간을 보낸다. 점심은 라면으로 대충 때우고, 지겨울 땐 집 근처 한강에 나가서 산책을 한다.

게다가 이씨와 어울리면 구청장한테 찍힌다는 소문이 나 직장 선후배들로부터 연락이 끊긴 지 오래고, 지인들도 이씨와 어울리면 찍힌다며 만나기를 꺼린다. '왕따'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구청의 국장 자리 하나가 비어 있고 엄연히 이씨가 업무를 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후배가 직무대리로 일하고 있을 뿐이다. 강제 전출는 물론 이같은 직무대리 임명 등은 인사 규정에 어긋난 부당한 조치지만 딱히 이씨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비리나 무능 등 다른 이유 때문은 아닐까? 하지만 이씨는 "그랬으면 감사를 당해 벌써 공직에서 쫓겨났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이씨는 "우울증 때문에 정신과 상담도 여러 번 갔다 왔다. 집사람이 '나쁜 생각은 하지 말라'고 신신 당부해 간신히 견디고 있을 뿐"이라며 "집사람과의 사이도 멀어지고, 하루 종일 갈 데가 없어서 집에서 놀고 있는 게 너무나 힘들다"고 호소했다. 이씨는 또 "한강에 가서 강물을 바라보면서 '남들이 이래서 자살을 하는 구나'라는 생각을 수도 없이 한다"고 한탄했다.

이같은 사실을 알고 아시아경제의 취재가 시작되고 보도가 됐지만, 강남구청은 보도 직전 사실 확인 및 해명 요청에도 응하지 않았을 뿐더러 기사가 나간 후 지탄 여론이 들끓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어떠한 시정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다. 오직 책임을 져야할 구청장도 아닌 부구청장이 나서 6월 지방선거를 의식한 듯 제목 수정 및 기사 삭제 요청만 몇 차례 전달해 왔을 뿐이다.

이 사건은 크게 몇가지 측면에서 문제가 심각하다. 우선 본인의 동의 없이 강제 전출을 보내려 했던 것이나 분명 직책에 맞는 직급자가 있음에도 보직을 주지 않고 하급자를 직무대리로 임명해 업무를 처리하는 것은 공무원 인사 규정 위반이다.

특히 그럼에도 이같은 문제가 강남구청 내부 자정 장치에서 여태 걸러지지 않았다는 점도 되짚어 봐야 한다. 감사원 출신의 개방형임용직으로 알려진 강남구청 감사관은 이같은 문제를 알고도 그냥 넘어가는 것인지, 아니면 모르는 것일까?

또 이씨 개인에 대한 인권 침해와 혈세 낭비를 지적할 수 있다. 이씨가 비록 정년 퇴임을 1년 5개월 여 앞둔 사람이지만, 명예퇴직을 거부할 권리는 있다. 후배들을 위해 용퇴하지 않았다고 해서 연봉 7000만원을 받고 있는 그에게 일을 주지 않는 것은 명백한 인권 침해이고 혈세 낭비다. 또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 보장의 문제도 거론된다. 4년 또는 5년 마다 바뀌는 정치인들과 달리 공무원들은 행정의 연속성, 전문성, 독립성 등을 위해 정년을 보장받고 인사 등에서도 배려를 받는 게 원칙이다. 선거 한 번 끝날 때마다 이씨 사례처럼 '피바람'이 불면 어느 공무원이 소신껏 일을 하겠는가. 복지 부동만 심해질 것이다.

졸지에 실업자가 돼 공원ㆍ산을 전전하다 목숨을 끊은 이땅의 수많은 아버지들의 아픔이 있지 않았나. 이씨가 만약 그사이에 나쁜 마음이라도 먹었다면, 그의 가족들에게 씻을 수 없는 커다란 상처를 주는 것은 물론 상사, 동료, 후배, 이를 방관한 우리 사회가 또 다른 커다란 죄를 짓게 됐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강남구청은 인사 규정 위반과 인권 침해, 혈세 낭비를 인정하고 이씨 본인은 물론 시민들에게 사과하고 시정해야 할 것이다.



김봉수 기자 bski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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