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그때, 이근호는 뛰고 있었다
[아시아경제 전성호 기자]29일 밤 쿠알라룸프르, 이근호(울산)가 활짝 웃었다. 두 손엔 21년간 한국과 인연이 없던 트로피가 들려있었다. 2012 아시아축구연맹(AFC) 시상식에서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며 아시아 최고의 선수가 됐다. '태양의 아들'에서 '아시아의 태양'이 되는 순간이었다.
빛은 어둠을 이겨낸 존재이기에 더욱 도드라지는 법. 이근호의 밝은 미소를 보며 문득 2년여 전 기억을 떠올린 것도 같은 이유였다.
2010년 8월, 조광래 감독의 A매치 데뷔전을 앞두고 25명의 대표 선수들이 파주NFC에 모였다. 소집 이틀째 날이었다. 공식 기자회견과 훈련이 모두 끝난 오후 8시 무렵. 샤워를 마친 선수들은 식당에 삼삼오오 모였다. 저녁식사와 수다로 훈련의 피로를 풀고 있었다. 그 광경을 뒤로한 채 파주NFC 정문을 빠져나왔다.
5분쯤 걸었을까. 인적 드문 길 반대편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뛰어왔다. 짙은 땅거미가 내려앉은 시간. 그림자의 정체는 뒤늦게 하나씩 파악됐다. 대표팀 트레이닝복 차림, 얼굴 가득 흘러내린 땀, 턱까지 차오른 호흡, 땅 아래로 고정된 시선. 이근호였다. 어느덧 옆을 스치고 지나간 그의 뒷모습. 한동안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근호는 '허정무의 황태자'였다. 한국의 7회 연속 월드컵 본선진출엔 그의 힘이 컸다. 월드컵 예선 기간 동안 7골을 쏟아부었다. 박주영(6골), 박지성(4골)보다 많은 대표팀 내 최다 골이었다. 공들였던 프랑스 파리 생제르맹(PSG) 이적도 눈앞에 왔다. 장밋빛 미래만이 기다리는 듯했다.
위기는 그때부터 찾아왔다. 결국 PSG 입단이 불발된 탓이었다. 정신적 스트레스가 그를 휘감았다. 마음의 짐은 몸의 족쇄로 이어졌다. 예전의 이근호가 아니었다. 부진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결국 2010 남아공월드컵 최종 23인 명단에서 이근호의 이름은 제외됐다.
그런 그에겐 훈련 뒤 짧은 휴식 시간조차도 사치였던 셈이었다. 차갑게 식어버린 '태양의 아들'은 어둠 속 러닝으로 다시 빛과 열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땀은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 이근호는 부활했다. 2011시즌 감바 오사카에서 15골을 넣으며 J리그 득점 3위에 올랐다. 올 시즌에는 울산 현대 유니폼을 입고 날아올랐다. 폭발적 드리블과 엄청난 활동량, 날 선 슈팅력, 상대 배후를 무너뜨리는 움직임까지 그야말로 절정이었다. 무엇보다 달라진 것은 자세였다. 그라운드에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릴 때면 어김없이 잔디 위에 쓰러졌다. 그를 지켜본 이들마다 득점이나 승패 여부와 관계없이 박수와 탄성을 보낸 이유였다.
자연스레 태극마크도 다시 그를 찾아왔다. 지난해 11월 UAE와의 월드컵 3차 예선을 시작으로 A매치 10경기에서 6골을 몰아쳤다. 이제 이근호는 당당한 대표팀의 핵심 멤버다.
'태양의 아들'은 어느새 '태양'으로 성장했고, 그 빛은 아시아를 뒤덮었다. 정점은 2012 AFC 챔피언스리그였다. 이근호는 대회 12경기에 모두 선발로 출장해 4골 7도움을 올리며 팀 우승에 공헌했다. 특히 4골 모두 16강 이후에 집중되며 울산의 ACL 사상 최초 토너먼트 전승 우승이란 대업에 큰 몫을 해냈다. 당연히 대회 최우수선수(MVP)도 그의 차지였고, 마침내 한국 선수로선 1991년 김주성 이후 21년 만에 아시아 최고 선수라는 영예를 누리게 됐다.
이근호는 축구 인생의 또 다른 전환점과 만난다. 12월 초 일본에서 열리는 2012 국제축구연맹(FIFA) 클럽월드컵을 치른 뒤 상무에 입대한다. 걱정보다는 기대를 부른다. K리그나 유럽 무대보다는 열악한 환경이지만, 그의 안에는 2년 전 파주의 어두운 도로를 달리던 열정과 노력이 그대로 살아있다. 태양은 달에 가릴지언정 그 빛을 잃지는 않는다. 이근호는 이미 아시아 최고의 선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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