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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위를 뛰는 저 남자, 시선을 붙잡는 브레송의 '찰칵 精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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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 라자르 역 뒤에서, 파리 1932 ⓒHenri Cartier-Bresson/Magnum Photos/유로크레온

생- 라자르 역 뒤에서, 파리 1932 ⓒHenri Cartier-Bresson/Magnum Photos/유로크레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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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오진희 기자] 한 남자가 땅에 떨어진 사다리를 살짝 밟고 고여있는 물 위를 막 뛰어올랐다. 물에 비친 남자의 그림자는 뒤쪽 벽면 포스터 속 춤추는 무용수의 동작과 유사한 모습으로 대칭을 이룬다. 무용수와 남자 사이에는 생 라자르 역 뒤편의 울타리 틈을 통해 무언가 응시하려는 또다른 남자가 있다. 울타리 역시 수면에 비춰져 새로운 세로 직선을 이룬다. 역의 지붕은 삼각, 사각형태로 기하학적 모양을 드러낸다. 역동적인 균형, 도형적인 완벽성, 놀라운 리듬감이 엿보인다.

'생 라자르 역 뒤에서'라는 제목의 사진이다. 앙리 카르티에-브레송(Henri Cartier-Bresson, 1908~2004년)이 응시하는 남자처럼 맞은편 울타리 사이에서 순간 포착한 작품이다.
카르티에-브레송은 20세기를 통틀어 사진계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떨쳤던 사진미학의 거장이다. 국내 미술 교과서에 기술된 유일한 해외 사진작가이기도 하다. 찰나의 순간에 보이는 명암과 형태, 시공간을 한 화면에 구성한 사진의 미학은 그로부터 완성됐다. 사진을 기록에서 예술로 한 걸음 전진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런 그가 직접 선정한 작품들로 구성된 회고전이자 유작전이 서울 세종로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고 있다. '앙리 카르티에-브레송展 - 결정적 순간'이다. 지난 2003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의 전시회를 시작으로 스페인, 독일, 이탈리아, 일본, 영국, 네덜란드, 이탈리아, 스위스, 호주 등 각국을 돌며 11번째로 지난 5월부터 국내에 소개된 것이다.

9년전 회고전을 개최하기 위해 카르티에-브레송은 최고의 기획자 로베르 델피르와 함께 자신의 작품 250점의 사진을 엄선했다. 당시 프랑스 전에서 자크 시라크 전 대통령은 추모성명에서 “시대의 진정한 증인으로서 그는 정열적으로 20세기를 찍으면서, 자신의 범 우주적인 불멸의 시각으로 우리로 하여금 인간과 문명의 변화를 영원히 기억하게 만들었다”고 경의를 표했다.
아브루치 산지의 아킬라 마을, 이탈리아 1951 ⓒHenri Cartier-Bresson/Magnum Photos/유로크레온

아브루치 산지의 아킬라 마을, 이탈리아 1951 ⓒHenri Cartier-Bresson/Magnum Photos/유로크레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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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작업세계와 인간성을 고스란히 담아낸 국내 기획전= 프랑스 전시에서 선보였던 사진들은 그대로 한국 순방 전시에서도 등장한다. 더불어 이번 전시에는 그의 작품세계와 관련된 각종 인쇄물, 어린시절 가족사진, 기자증, 편지 등 전 생애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 125점, 그의 데생작품 2점과 영상도 함께 전시된다.

하지만 앞서 여러 나라에서 진행된 카르티에-브레송 전이 주로 대륙별 사진으로 구분돼 열렸다면, 이번 한국 순방전은 큰 차이가 돋보인다. 전시기획의 기존 구성방식을 해체해 재구성한 것이다.

이에따라 전시장안에서는 ▲찰나의 미학 ▲내면적 공감 ▲거장의 얼굴 ▲시대의 진실 ▲휴머니즘 등 5가지 테마를 따라 작가의 작품세계와 인간적인 면모들을 속속들이 살펴볼 수 있다. 시(時) 처럼, 카르티에-브레송의 사진처럼 전시장내 작품들도 펼쳐지고 모여져 주제별 내용별로 리듬을 타고 있다. 이번 전시의 기획과 작품분류, 편집 등을 맡은 이는 이기명 한국매그넘에이전트 대표다.

'찰나의 미학'에서는 당시 소형카메라를 들고 움직임을 포착했던 작가의 독보적 작품세계를 선보이고 있다. 1930년까지 사진작가들 사이에서 사진을 찍는 행위는 중형카메라를 사용해 정지된 대상이나 정물을 촬영하는 것이 대세였다. 그러나 카르티에-브레송은 소형카메라인 '라이카'로 거리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대상을 아주 신속하게 촬영해 거리 사진의 미학을 전한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사진에 찍히는 찰나의 시공간은 조형적인 완벽과 기하학적 구성의 조화가 연출된다. '아브루치 산지의 아킬라 마을'이란 작품도 이탈리아 아킬라 마을 계단 난간의 지그재그 선을 따라 두 사람씩 쌍을 이루고 있는 전경과 중경, 원경의 한 무리 사람들까지 자연스럽게 시선이 흐르게 된다.

스리나가르, 카슈미르 1948 ⓒHenri Cartier-Bresson/Magnum Photos/유로크레온

스리나가르, 카슈미르 1948 ⓒHenri Cartier-Bresson/Magnum Photos/유로크레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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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적 공감'에서 선보여지는 '스리나가르, 카슈미르' 사진은 인도 북서부 지역인 카슈미르의 스리나가르의 언덕에서 히말라야 산맥 너머로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기도하고 있는 맨발의 무슬림 여자들의 뒷모습이 나타나있다. 힌두교-이슬람교 종교분쟁으로 카슈미르 귀속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의 시대, 이 사진에서 경건한 의식이 순간적으로 포착됐다.

전시장에는 카르티에-브레송이 찍은 20세기 주요 인물들의 초상사진들도 있어 흥미롭다. 천재화가 피카소가 웃통을 벗고 침실에서 서있는가 하면 앙리 마티즈가 말년을 보내며 비둘기를 관찰하는 장면도 포착됐다. 이외에도 수많은 소설가, 예술가, 과학자 등 인물들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이기명 대표는 "카르티에-브레송은 인물사진을 찍을때 그 사람의 인생과 작업세계를 두루 살피면서, 사진을 찍는 찰나 가장 그 인물을 자연스럽게 나타낼만한 순간을 기다렸다"고 설명했다.

화가, 앙리 마티스 1944 ⓒHenri Cartier-Bresson/Magnum Photos/유로크레온

화가, 앙리 마티스 1944 ⓒHenri Cartier-Bresson/Magnum Photos/유로크레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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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그넘 공동창립멤버이자, 기록적인 사건사고 사진을 남겼던 그는 시대의 진실을 담아냈다. 국민당이 물러나고 공산당이 지배하는 새로운 중국이 탄생하는 역사의 현장을 기록해 당시 청말 마지막 환관의 모습을 찍었고, 일본 가부끼 배우의 장례식장 사람들의 애도모습 등도 전시장에서 살펴볼수 있다.

더불어 1930년대 유럽의 사회정치적 문제에 대한 관심으로 자연스럽게 좌파 지식인으로 성장해간 그의 생애가 사진속에도 녹아있다. “인간애의 뜨거운 관심이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해야 한다”고 했던 그의 사진 철학 중 하나가 바로 '휴머니즘'이었기 때문이다. '부지발 근교 수문'은 일가족과 애완견까지 모두 나와 일터로 나가는 가장을 배웅하는 장면으로 화목한 가족애를 느낄수 있다.

부지발 근교 수문, 프랑스  1955 ⓒHenri Cartier-Bresson/Magnum Photos/유로크레온

부지발 근교 수문, 프랑스 1955 ⓒHenri Cartier-Bresson/Magnum Photos/유로크레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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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명 대표는 "세상 곳곳을 찾아 기록적인 사진을 남긴 사진기자로서의 자질과 함께 순간포착의 미학을 완성하고 소형카메라로 카메라와 신체를 동화시켰던 그는 사진사(史)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라면서 "민첩하게 움직이는 것을 찍으려했던 그는 수동소형카메라의 초점을 재빨리 맞추기 위해 침대위에서 뛰면서까지 연습을 했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특히 이번 전시는 생전에 과도한 상업적 사용을 방지하기 위해 필름 프린트를 제한했던 그가 마지막 회고전에서는 영구보존 인화지에 필름프린트를 했던 작품이 선보여져 깊고 심오한 느낌을 자아낼 것"이라면서 "첫 회 프랑스 전에서 소개된 사진과 액자, 매트, 인화지 그대로 가지고 왔기 때문에 사진 전공자들에게도 귀중한 공부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의 초상사진, 노르망디, 프랑스 1970 ⓒMartine Franck/Magnum Photos/유로크레온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의 초상사진, 노르망디, 프랑스 1970 ⓒMartine Franck/Magnum Photos/유로크레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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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서 신화였고 죽어서 전설이 된 위대한 사진작가 = 카르티에 브레송은 20세기 근대 사진를 대표하는 작가이자 현대사진의 문을 연 선구자다. 또한 그는 지난 1947년 로버트 카파, 조지 로저 등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들과 함께 작가주의를 지향하는 사진에이전시 '매그넘'을 창립하기도 했다.

프랑스 전통 섬유집안의 부유한 가문에서 출생한 그는 어릴적부터 인문·사회적 교양을 풍부히 쌓았다. 20대에 이미 지중해 연안, 멕시코, 미국 등 각지를 돌며 사진을 찍고 개인전을 열었다. 1940년 2차세계대전 당시 그는 프랑스 육군에 입대해 독일군의 포로가 돼 3차례의 탈출을 시도했고, 성공한 후 전쟁포로와 탈주자를 위한 레지스탕스 조직에 참여하기도 했다. 매그넘 설립 이후에는 인도, 미얀마, 파키스탄, 중국, 인도네시아, 일본 등 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기록사진을 무수히 남겼다. 1952년에는 현재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사진집 '결정적 순간'이 만들어졌고, 1955년 생존 사진작가 처음으로 루브르 박물관에서 사진전을 개최했다. 그는 프랑스에서 첫 회고전을 연 후 1년 만에 별세했다.

다음달 2일까지. 세종문화회관 문의 02-735-4237



오진희 기자 val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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