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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업성장史]⑬'빅3 민족은행'이 광복직전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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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업성장史]⑬'빅3 민족은행'이 광복직전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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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조선의 은행들 흥망성쇠
-일제 고금리 수탈에 대항하기 위해 생긴 민간은행들
-1927년에 전국 17개나 되며 근대금융의 근간 마련했지만
-총독부의 집요한 통폐합에 일제말기 모두 간판을 내려야만 했다

굳게 닫혀 있던 왕조의 문이 일본에 의해 활짝 열리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일본 상인들이 밀려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서구의 근대적 공장에서 만들어낸 새롭고 진기한 상품을 개항장으로 마구 들여왔다. 쇄국의 견고한 울타리 안에만 머물러 있던 조선의 시장 역시 개화 상품에 열광했다.

그러나 조선 상계는 새로운 수요에 대응할 만한 자본도 기술도 아직은 변변히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조선 왕조의 산업을 지배해오던 종로 상계는 일본에 의해 주도된 갑오경장(1894년) 이후 붕괴하고 만 상태였으며 근근이 이어져 오던 수공업자들도 근대산업을 감당하고 나설 처지가 되지 못했다.
때문에 이 시기 내세울 수 있는 민족 자본이라야 극히 제한적인데다, 보잘 것이라곤 없었다. 몇몇 토지 자본가들을 비롯해 원면에서 실을 뽑아 옷감으로 만들어내는 방직업, 일본 고리대금업자들과 일본계 은행들이 판을 치고 있는데 자극을 받아 뒤늦게 뛰어든 금융업, 예컨대 몇 개의 은행이 전부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은행은 장안의 부호들이 가장 선망하는 산업이었다. 이른바 '돈 놓고 돈 먹는' 금융업이야말로 사업 경험이 전무 했던 당대 자본가들에겐 가장 안전한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내로라 하는 한성의 부호들이 너도나도 은행업에 뛰어들거나 뛰어들길 원했다. 따라서 다른 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산의 동원 규모 또한 꽤나 큰 편이었다.

은행의 탄생은 개항과 더불어 시작됐다. 개항 이후 조선에서 상업과 무역에 종사하는 자국 상인들의 경제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일본 제일은행(1878년)이 부산포에, 제18은행(1889년)이 원산에, 제50은행(1892년)이 제물포에 출장소를 개설한데 이어, 영국의 홍콩상해은행(1896년)이 제물포에, 한성의 러시아공관에 개설된 한로은행(1889년)이 그 효시였다.
헌데 이런 은행들은 자국 상인들을 위해 예금, 대출, 송금과 같은 은행 고유의 영업을 하고 있으면서도 조선 상인과는 거의 관계를 갖지 않았다. 자국 상인들과 밀착돼 있을 뿐 조선 상인들을 위해서는 어떤 편리함도 개발하려 들지 않았다.

이에 따라 근대적 금융기관으로서 조선의 민족 은행이 설립되기 시작했다.
먼저 대한제국의 황실과 관료들이 적극적으로 나서 화폐 제도와 재정 제도의 혼란을 극복하고 일본 은행의 침투를 막아내기 위한 노력이 최초의 결실을 맺은 것은 1896년에 설립된 조선은행이었다. 조선은행은 황실과 함께 독립협회를 주도한 고위 관료가 발기하고 그들과 협력 관계에 있던 한성의 조선 상인들이 참여해 설립됐다.

그러나 황실에 의해 만들어진 조선은행은 순항을 계속하지 못했다. 독립협회의 쇠퇴와 함께 그 운명을 같이 할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 다시 황실에 의해 설립된 한성은행의 운명 또한 다르지 않았다. 한성은행은 설립과 동시에 조세금을 취급할 권리를 획득하면서 유리한 조건 속에 영업을 개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듬해에 대한천일은행이 설립되면서 황실의 지원이 한성은행에서 대한천일은행으로 집중됐고 결국 한성은행의 영업은 부실해지고 말았다.

고종으로부터 내하금 3만원을 지원받으면서 출범하게 된 대한천일은행에는 앞서 설립한 조선은행과 한성은행의 시행착오와 한계를 학습 삼아 우선 주요직에 황실에서 신임하는 관료들이 배치됐다. 조선은행과 한성은행이 황실이 설립을 주도하고 관료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는 형식이었다면 대한천일은행은 거꾸로 한성의 거상이었던 김두승 김기영 백완혁 조진태 등 민간인들이 설립을 주도하고 황실에서 적극적인 지원을 받는 형식으로 체질을 강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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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에는 영친왕이 은행장으로 취임해 은행의 정치적 지위와 사회적 신뢰를 더욱 공고히 다졌다. 영친왕의 취임과 더불어 주주와 자본금도 크게 늘어났다. 1905년에는 주주가 51명으로 늘어났으며 불입 자본금 또한 법정 자본금 5만6000원을 모두 채울 수 있을 정도가 됐다.

그러면서 대한천일은행은 일본에 의해 기습적인 화폐개혁이 단행되던 1905년 한 해 동안 영업을 잠깐 정지한 것 말고는 오늘날 우리은행에 이르기까지 그 오랜 역사를 면면히 이어오고 있다. 한 세기 넘게 줄곧 금융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다해오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하더라도 대한천일은행만으로 조선 상계의 금융 문제를 모두 다 해결하기는 어려웠다. 더구나 일본은 이미 조선 상계가 이용할 수 있는 재정 자금의 길을 철저히 차단시키는 한편 대신에 일본인이 지배하는 금융기관을 구축, 식민 지배를 본격화하면서 무엇보다 자금 경색이 심각해진 상태였다.

그에 반해 조선에 진출한 일본 상인들의 자금 운용은 상대적으로 용이했을 뿐더러, 오히려 조선 상인들이 겪고 있는 자금 경색에 편승해 축적된 자금을 이용한 고리대금업에 나서고 있었다. 게다가 이들 금융기관의 금리는 자국 상인들보다 조선 상인이 월등히 높았다. 고금리의 수탈로 조선 상인들을 압박했던 것이다. 이런 압박은 식민 지배를 본격화한 일본이 원하던 구도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고금리는 한국 상인들에게 큰 문제였으나 반면에 민간은행 설립이 안정적인 수익을 보장하는 결정적 조건이 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일본 상인들의 고금리가 민간은행 설립의 주요한 배경이 됐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은행 설립은 상당한 규모의 큰 자본을 필요로 했다. 따라서 은행업에 진출한 이는 대개 지주였다. 그 때까지만 해도 자산의 주요 형태가 토지였던 점을 감안하면 민간은행 설립에 참여했던 이들이 지주였다는 사실은 너무도 당연했다. 또 이들이 은행 설립이나 경영에 참여함으로써 비로소 지주들의 부르주아화 변신을 촉진하는 계기가 됐다.

그 결과 1910~1920년 전국의 주요 도시에 민간은행이 잇따라 설립됐다. 1921년까지 한일은행, 한호농공은행, 밀양은행, 선남은행, 부산상업은행, 대구은행, 호서은행, 경남은행, 삼화은행, 평양은행, 동래은행, 신의주은행, 원산상업은행, 삼남은행, 경일은행, 조선실업은행, 경상공립은행, 호남은행, 대동은행, 해동은행, 동일은행 등이 각기 영업을 개시하고 나섰다.

그러나 1920년대 이후 민간은행은 더 이상 설립될 수 없었다. 조선총독부에서 과잉 투자 분야로 규정하면서 점차 상호 간에 흡수·합병돼 가는 순서를 밟았다. 은행 간의 흡수·합병은 은행 자본의 집중화 과정이자 한국계 은행 자본의 도태 과정이기도 했다.

1929년 17개이던 한국계 민간은행이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전시 금융 통제에 들어갔을 땐 조선 전체를 다 둘러보아야 겨우 10개를 손꼽을 수 있는 정도였다. 그나마 언제 어떻게 사라질지 모르는 소규모 지방 은행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경성에서 제법 규모를 갖춘 은행이라야 박영철 소유의 조선상업은행, 민대식 소유의 동일은행, 김연수 소유의 해동은행 등 3개가 고작이었다.

따라서 이 세 은행장은 당시 한인 상계에서 단연 총아였다.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은 언제나 장안의 화제였으며, 이들 세 은행장의 하루 일과를 들여다 볼 수 있다는 건 결코 놓칠 수 없는 흥미로운 관심사가 아닐 수 없었다.

먼저 조선상업은행의 박영철은 전주 출신이었다. 그의 부친 박기순은 전라도 53개 고을에서 모르는 이가 거의 없다할 만큼 소문난 만석지기의 대지주였다. 이런 토호의 집안에서 태어난 박영철은 일찍이 일본 도쿄로 건너가 육군사관학교를 마친 뒤, 구한말 무관학교 교관을 시작으로 군 요직을 두루 거쳤다. 1910년 한일병합 이후에는 군수, 참여관, 함경도지사 등을 지내오다 아버지 박기순이 은행장으로 있던 삼남은행을 맡으면서 은행업에 투신했다. 나중에는 조선상업은행을 소유하면서 은행장에 올랐다.

박영철의 은행 출근시간은 대개 오전 9시 전후였다. 그 때부터 밀려드는 방문객을 맞이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냈다. 교제의 범위가 넓을 뿐 아니라 오랫동안 관계와 군부에 몸을 담았던 터라, 그를 찾는 이가 하루에도 적지 않았다. 여기에다 그가 특별히 애정을 쏟고 있는 동민회 일과 신문 기자들과의 인터뷰 등이 줄을 이었다. 여기다 며칠에 한 번은 총독부 재무국장을 방문해 은행 관련 최고 협의를 해야 했다.

정오부터는 점심시간이었다. 그러나 아직 만나야 할 사람이 많고, 은행 관련 정보를 위해 점심은 으레 은행집회소에서 하기 일쑤였다. 그곳에서 경성 상계의 유력 인사들과 함께 금융 관련 정보를 교환하고 공유하곤 했다.

저녁시간은 대개 주연으로 이어졌다. 박영철은 자신의 저택 정원에서 주연을 베풀길 즐겼다. 특히나 신년 초에는 총독부 대관들을 비롯해 경성 상계의 유력 인사들을 한 자리에 초청해 대연을 베풀곤 했는데 하루 저녁 연회 비용이 자그마치 3000원(지금 돈 약 3억6000만원)에 이를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저녁시간에 주연이 잡혀있지 않은 날엔 가까운 친구를 불러 자신의 집에서 바둑으로 한가한 시간을 보냈다. 일요일에는 주로 청량리에 자리한 이왕직 골프장으로 나가 골프로 건강을 챙겼다.

한편 동일은행의 민대식은 조선에서 가장 돈 많은 민영휘의 장남으로, 일찍이 영국 검교(케임브리지)대학교 경제학과를 유학하고 돌아온 엘리트였다. 그는 아버지 민영휘가 조선한일은행을 150만원(지금 돈 약 1800억원)에 인수하자, 자신이 사장으로 있던 광업주식회사와 다시 합병하여 자본금을 200만원(지금 돈 약 2400억원)으로 증액시켰다. 그러다 또다시 호서은행을 합병하면서 자본금 400만원(약 4800억원)의 동일은행으로 재출범했다.

민대식 역시 오전 9시쯤 출근해서 고위 간부와 함께 어떻게 하면 불량 대출 건을 회수하고 정리할 수 있는지 경영 전략을 수립했다. 오후에는 가끔 계명 구락부(회합소)에도 나갔다. 그곳에서 바둑계의 고수 가운데 한 사람인 매일신보 최린 사장과 마주앉아 바둑 일전을 벌이거나 당구를 치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그곳에 모인 지식인들과 어울려 세상 돌아가는 흐름에 대해 한담을 나누기도 했는데 대개는 그 연장선상으로 저녁 주연으로 이어지기 마련이었다.

마지막으로 일본 교토대학교 경제학과를 유학하고 돌아온 해동은행의 김연수 역시 아침 출근 시간은 9시 무렵이었다. 은행에 출근하면 예외 없이 은행 업무는 물론, 맏형인 김성수와 함께 이끌어가고 있는 경성방직과 경성상공 등 계열 회사의 업무로 분주한 시간을 보내기 마련이었다. 또 며칠에 한 번은 총독부를 방문해야 했다. 재무국장을 만나 은행 관련 최고 협의를 해야 하는 것은 조선상업은행의 박영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낮 동안에는 은행집회소에도 나가봐야 했다. 경성 상계의 유력 인사들이 모여 금융 관련 정보를 서로 교환하는 까닭에서였다. 그런가하면 교토대학 동창회 일도 그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관심사 가운데 하나였다.

이같이 하루의 해가 짧기만 한 그에게 저녁이면 으레 주연의 자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누구를 요릿집으로 초대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 대신 저녁마다 거의 빠짐없이 초대를 받아 명월관으로, 식도원으로 다니면서 어울려야 했다. 대부분 해동은행의 고객 상인들이거나 예금주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세 은행마저 일제 말기에 접어들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된다. 한국계 은행 자본의 도태 과정이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이후에도 은행 간의 흡수·합병과 도태가 계속됐던 것이다. 예컨대 호남은행이 동래은행을 합병해 수권 자본금을 법정 한도액인 200만원(약 2400억원)까지 높여 영업을 지속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었으나 끝내 1942년 민대식의 동일은행에 합병되는 비운에 처하고 말았다.

동일은행은 이처럼 호남은행과 합병해 몸집을 불린 결과 끝까지 유일하게 살아남은 한국계 은행이었다. 하지만 1943년 이미 일본계 은행으로 넘어가고 만 한성은행과 다시 합병되고 말면서 조흥은행(훗날 신한은행으로 합병)으로 이름을 바꿔야 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던 동일은행마저 사라지게 됨으로써 해방 직전 한국계 은행은 완전히 소멸하고 말았다.

돌이켜보면 1910년 이래 일본 상인들의 고금리에 반발하며 민간 은행들이 들불처럼 탄생했다가 이내 사라졌다. 그러나 민간 은행들은 일제 치하 격변하는 시장 환경 속에서도 그나마 한인 상인들이 전멸하지 아니하고 전통적인 종로 상권을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게 해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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