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리코·애브비 2.6조원 연구도 허탕
FDA 규제 변화에 데이터·재생의료서 기회

편집자주항노화는 더 이상 웰니스 산업의 주변 담론에 머무르지 않는다. 글로벌 빅파마들은 노화 자체를 신약의 직접 표적으로 삼아 수십억달러의 자금을 거침없이 쏟아부으며 '게임의 법칙' 자체를 다시 세우는 중이다. 누구보다 더 빠르게 첫 걸음을 내디뎠던 한국은 초기 투자와 컨트롤타워의 부재, 분절된 정책 등에 가로막혀 크게 뒤처진 실정이다. 그러나 데이터, 재생의료, 정밀진단 인프라 측면에선 우리에게도 기회가 열려 있다. 아시아경제는 글로벌 항노화 산업의 현주소와 미래를 짚어보고 한국의 나아갈 길을 모색한다.

①글로벌 신산업으로 자리매김한 '노화와의 싸움'

②빅파마도 못 푼 노화신약, 한국에 열린 '틈새'

③구글보다 빨랐던 삼성 항노화 연구, 왜 13년 뒤처졌나

④한국판 아이멕 꿈꾸는 K-빅하트


노화신약의 성공사례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글로벌 빅파마와 빅테크가 10년 넘게 자본을 쏟아부었지만 미국 식품의약국(FDA) 승인에 도달한 후보물질은 없다. 1세대 노화 신약의 잇단 실패는 단순 자금력이 성패를 가르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줬다는 것이다. 한국 바이오의 기회 역시 빅파마와 같은 규모의 투자가 아니라 정밀 데이터와 차별화된 접근 전략에서 찾아야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13일 제약·바이오 업계에 따르면 노화신약은 노화의 분자 기전을 직접 조절해 노인성 질환의 발생 자체를 늦추는 약물이다. 기능을 잃은 채 염증을 유발하는 노화세포를 선택적으로 제거하거나, 분화 시계를 되돌리거나, 노화 가속 대사 경로를 차단하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발병 후 개별 질환을 치료하는 기존 약물과는 출발점이 다르다.


대규모 자금이 투입된 연구도 성과를 내지 못했다. 2014년 시작된 알파벳 자회사 칼리코와 애브비의 노화 연관 질환 공동개발 협력 프로젝트는 11년간 17억5000만달러(약 2조5812억원) 이상이 투입됐지만 단 한 건의 신약 허가에도 도달하지 못한 채 지난해 11월 종료됐다. 자본과 데이터 인프라를 모두 갖춘 빅테크-빅파마 조합조차 노화의 생물학적 복잡성 앞에서 결실을 거두지 못했다.

알파벳 자회사 칼리코와 애브비의 기업 로고 이미지. 칼리코·애브비

알파벳 자회사 칼리코와 애브비의 기업 로고 이미지. 칼리코·애브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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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화의 복잡한 생물학, 여기에 규제 장벽까지…개발은 난항


칼리코·애브비의 실패는 과학적 한계와 제도적 한계가 동시에 작동한 결과로 여겨진다. 노화세포는 조직마다 모양과 작동 방식이 달라 모든 노화세포에 동일하게 작용하는 표적 단백질이나 바이오마커가 존재하지 않는다. 단일 기전을 겨냥한 약물이 실제 환자에서 일관된 효과를 내기 어렵다. 규제는 연구 설계 과정부터 난항을 겪게 했다. FDA가 노화를 독립 적응증으로 인정하지 않는 탓에 기업들은 골관절염·황반변성·섬유화 질환 등 노화 연관 개별 질환을 적응증으로 임상을 설계해야 한다. 노화 기전을 표적해도 평가지표는 결국 개별 질환의 증상 개선 여부로 좁혀지게 되는 것이다.

규제 한계를 넘기 위한 시도는 미국에서 이미 시작됐다. 제2형 당뇨병 치료제로 널리 쓰이는 메트포르민을 후보물질로 한 TAME(Targeting Aging with Metformin) 임상이다. 3000명 규모로 심근경색·심부전·뇌졸중·암·치매·사망 등 노화 연관 질환의 발생 시점을 묶어 1차 평가지표로 삼는 임상 시험의 설계는 FDA의 의견을 반영해 짜였다. 임상 시험 자체는 펀딩 지연으로 본격 가동이 늦춰지고 있지만 FDA가 '노화에 근접한 평가지표'를 사실상 처음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규제 패러다임의 문이 열렸다는 평가다. 항노화 업계는 이를 계기로 산업의 경쟁 축이 자본 베팅에서 데이터·바이오마커 정밀도 경쟁으로 이동했다고 본다.

[바이오의 새 길, 항노화]②빅파마도 못 푼 노화신약, 한국에 열린 '틈새' 원본보기 아이콘

전문가들은 한국이 미국보다 빠른 재생의료 임상·허가 속도에서 강점을 확보할 수 있다고 말한다. 2020년 시행된 첨단재생의료 및 첨단바이오의약품 안전 및 지원에 관한 법률(첨생법)과 2025년 제도 개편으로 한국은 세포·유전자 기반 치료제의 임상 진입 속도에서 미국·유럽 대비 상대적 이점을 확보했다. 노화 연관 질환을 표적하는 국내 재생의료 기업이 임상 진입 단계에서 글로벌보다 시간을 벌 수 있는 구조다.


세계적 수준의 의료·건강 데이터 인프라도 보유하고 있다. 한국은 전자의무기록(EMR)·국가건강검진·바이오뱅크 축적 수준이 글로벌 상위권이다. 후성유전학·단일세포 분석·멀티오믹스에 인공지능(AI)을 결합한 정밀 노화 분석 플랫폼은 자본 규모보다 데이터의 깊이와 정합성이 결정적인 영역으로 여겨진다. 백승필 고려대 세종캠퍼스 생명정보공학과 교수(생체시계 기반 항노화 융합 선도연구센터장)는 "글로벌 빅테크와 동일한 방식의 자본 경쟁은 어렵다"며 "정밀 데이터·AI·시간생물학·천연물 소재의 융합이 가장 현실적이고 경쟁력 있는 접근"이라고 말했다.


시간생물학 기반 정밀의료도 한국의 강점으로 꼽힌다. 세포의 회복·대사·DNA 복구·면역 기능은 모두 생체시계 리듬의 영향을 받는다. 같은 약물도 투약 시점에 따라 효능과 독성이 달라진다. 적은 자본으로도 약물 재창출과 맞춤형 투약 최적화 분야에서 산업적 가치가 높은 후보를 발굴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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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교수는 "노화를 유발하는 분자 기전 다수가 생체시계 리듬 교란과 직결돼 있다"며 "약물 투여 시간과 세포 재프로그래밍 유도 시점을 신체 리듬에 맞춰 최적화하는 시간생물학 기반 정밀의료가 항노화 산업의 한 축으로 부상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미토콘드리아 기능·염증 조절·생체시계 안정화에 관여하는 천연물·해양바이오 소재를 작용 기전이 명확한 단일 물질로 정제해 시간생물학 기반 제형으로 연결하는 접근도 한국의 인접 강점을 살릴 수 있다는 제언이다.


박정연 기자 jy@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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