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대 그룹 로비스트, 트럼프 1기 대비 갑절
美 정부·의회·기관 출신 '리볼버' 전면 배치
5년간 로비 1000억…미국 공략 나선 한화
#. 삼성전자는 미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첨단 반도체 공장을 설립하면서 반도체지원법(CSA)에 따른 보조금을 받기 위해 ‘물밑 로비’에 나섰다. 그룹 차원에서 2024년 한 해 지출한 로비 금액만 698만달러(100억3000만원)에 달한다. 글로벌 대관 업무를 총괄하는 GPA(Global Public Affairs)가 발 빠르게 움직이는 한편, 커빙턴 앤 벌링(Covington & Burling LLP)이라는 다국적 로펌도 가세했다. 각국 정부 및 국제기구를 상대로 한 로비(lobbying)가 특기다.
#. 현대차그룹은 K&L 게이츠(K&L Gates LLP), 머큐리(Mercury Public Affairs) 등 명성이 자자한 로펌(로비업체)을 고용했다. 미 행정부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에 대응하기 위해서다. 특히 대규모 투자를 집행한 조지아주 출신 의원들을 적극 공략했다. 버디 카터 하원 의원(공화당)은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현대차를 배제한 IRA 법안을 비판했고 라파엘 워녹 상원 의원(민주당)은 현대차도 보조금을 받도록 하는 IRA 수정법안을 발의했다.
◆‘행동대장’ 로비스트 고용 7년 새 2배=국내 10대 그룹이 조용한 외교전을 펼치는 기저에는 ‘첨병’ 로비스트가 있다.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백조가 우아한 모습과 달리 물속에서 발을 분주히 움직이는 것과 같다. 특히 미정부·의회·규제기관 출신 인사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기업 입장이 정책에 반영되도록 애쓰는 모습이다. 최근 5년간 북미 공략을 확대한 주요 기업들의 로비 금액은 1000억원을 넘겼다.
해외 대관조직을 별도 가동 중인 5대 그룹은 현지 로비스트를 고용해 필요한 사항을 전달한다. 로비스트는 기업 대관조직의 행동대장이다.
대면 업무를 담당하는 이들의 의존도는 점차 커지는 모습이다. 아시아경제가 18일 미 상원 로비 데이터베이스, 비영리 기구 오픈시크릿 자료를 바탕으로 ‘5대 그룹’의 로비 활동을 분석한 결과 삼성·SK·현대차·LG·포스코 등이 지난해 고용한 로비스트는 159명에 달했다. 트럼프 1기 행정부가 출범했던 2017년 85명과 비교해 7년 새 갑절로 늘었다. 삼성전자가 64명으로 가장 많았고 현대차가 40명으로 뒤를 이었다. 특히 현대차는 로비스트 증가 규모가 4배를 웃돌 정도로 그 폭이 두드러졌다. 특히 지난해 삼성과 현대차가 고용한 로비스트만 104명, 7년 전 5대 그룹의 로비스트를 다 합친 것보다 많았다. SK그룹도 이 기간 로비스트 숫자를 15명에서 31명으로 크게 늘렸다.
눈여겨볼 지표는 ‘리볼버(Revolver·회전문)’로 표현되는 정부 출신 로비스트 숫자다. 미정부·의회·규제기관 출신으로, 공직에서 물러난 뒤 기업에 고용된 로비스트를 뜻한다. 정부와 민간을 오간다는 의미에서 ‘리볼버’라는 별칭이 붙었다. 기업들이 고용한 로비스트 중 리볼버의 비중이 늘었다는 건 그만큼 미국의 정책·규제 수립에 관여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할 필요가 커졌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삼성전자는 2017년 로비스트 39명 중 32명이 리볼버였다. 지난해 리볼버 수가 39명으로 늘면서 트럼프 1기 시절 전체 로비스트 수에 필적했다. SK그룹도 로비스트 31명 중 20명이 리볼버다. 현대차는 2017년 그 숫자가 8명에 불과했지만, 지난해엔 23명까지 늘었다.
현대차가 워싱턴사무소 부소장으로 영입한 로버트 후드 역시 리볼버다. 그가 트럼프 1기 국방부 차관보를 지낼 당시 역할은 국방부와 의회를 오가면서 관계를 조율하는 ‘대관 업무’였다.
◆기업들 로비액 1000억원=삼성·SK·현대차·한화 등의 최근 5년간 로비 지출액은 1000억원에 육박했다. 특히 한화그룹은 북미 영업을 강화하면서 이 기간 로비액을 8배 가까이 늘린 것으로 확인됐다.
삼성은 2020년 333만달러에서 지난해 698만달러(100억3000만원)로 지출을 늘리면서 기록을 경신했다. SK는 559만달러(80억3000만원)를 썼다. SK이노베이션이 LG에너지솔루션과 배터리 영업비밀 침해 분쟁을 벌이던 2021년에는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의 수입 금지 조치를 막으려 612만달러를 지출했다.
현대차그룹은 328만달러(47억1000만원)를 지출했다. 2022년 처음으로 200만달러를 돌파한 뒤 꾸준히 비슷한 규모의 예산을 투입하고 있다. 현대차그룹의 로비 현안은 수소와 연료전지 정책, 전기차 인프라와 세제 혜택 정책, 환경보호청(EPA)의 배출가스 규제 등이다.
가장 공격적으로 변모한 기업은 한화그룹이다. 2020년 로비액은 45만달러에 불과했지만 지난해 391만달러(56억2000만원)를 신고하면서 현대차를 앞질렀다. 미 상원 보고서를 보면 태양광 패널 관세를 놓고 로비 활동을 벌였다. 5년 새 로비액 증가율은 769%에 육박한다. 최근 북미 방산시장 영업력을 강화하고 나선 만큼 더 치열한 로비 활동을 전개할 것으로 보인다.
주요 기업들 지출이 급증한 배경은 미국의 정책 변화와 맞물려 있다. 반도체·전기차 등 핵심 수출 산업에서 미국 내 생산과 투자를 확대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국가 안보와 직결되는 방산 분야는 현지 정부를 설득하는 게 더욱 중요하다. 방산업계 관계자는 "현지 조달 정책과 국방부 기준을 충족해야 하는데, 장기적인 신뢰를 구축하는 게 핵심"이라고 했다.
다만 과도한 로비로 미국의 산업 정책에 종속되지 않도록 정부 차원의 지원사격도 확대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주미한국대사관 출신 외교관은 "과거 한국 기업들은 미국의 정책 변화에 사후 대응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젠 리스크를 사전에 차단하겠다는 전략"이라며 "주요 대기업이 글로벌 플레이어로 성장한 만큼 정부의 공동 대응도 뒷받침돼야 한다"고 짚었다.
장희준 기자 junh@asiae.co.kr
조성필 기자 gatozz@asiae.co.kr
우수연 기자 yesi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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