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류상 계약' '소유권 확보' 까지
각자 다른 의미로 쓰는 '공급' 이라는 단어가
부동산 정책 두루뭉술하게 포장
'분양' '착공' '입주'처럼 국민들이 알기쉽게 써야
올해 여름 서울 아파트값이 치솟은 이후, 정부가 가장 많이 쓴 단어는 ‘공급’이었다. 지난달 나온 8·8대책만 봐도 알 수 있다. 당시 정부가 발표한 ‘주거 안정을 위한 주택공급 확대 방안’과 ‘서울·수도권 42만7000호 공급’ 자료에 있는 ‘공급’이라는 단어를 세어보면 무려 130개에 달한다. ‘공급’으로 시작해서 ‘공급’으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부가 이렇게 "주택공급을 충분히 할 테니 기다려달라"고 해도 시장은 들은 체 만 체다. 따지고 보면 ‘공급’이라는 단어는 국민들이 평소에 쓰는 말이 아니다. ‘청약’ ‘분양’ ‘입주’ ‘착공’ ‘준공’ 같은 단어들이 훨씬 친숙하고 일반적이다. 국민들과 소통해 집값을 안정시키겠다는 정부가 정작 국민들은 안 쓰는 단어로 정책을 만드는 실정이다. 이쯤 되면 국민들도 부동산 대책에 공감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 한다고 보는 게 정확할 것이다.
국토부 자료를 하나하나를 뜯어보면 ‘공급’이라는 단어는 암호처럼 해독해야 하는 존재다. 공무원들에게 "이 자료 제목에서 ‘공급’은 무슨 뜻이냐"고 물어봐야 명확한 대답을 들을 수 있다. 예를 들어 ‘2029년까지 3기 신도시 23만6000호 공급’(7월18일)에서 공급은 ‘분양’을 말한다. 착공은 분양과 동시에 이뤄진다. 이를 감안하면 2029년까지 분양을 한다고 해도 짓는데 최소 3~4년 이상 더 걸린다. 지금으로부터 10여년은 지나야 저 물량의 3기 신도시 아파트가 다 지어져 입주할 수 있다는 의미가 행간에 숨어 있다.
전세 사기를 당한 빌라를 정부가 경매로 산 다음, 시세보다 저렴한 전세로 풀겠다는 ‘든든전세’ 정책도 해석이 필요하다. ‘HUG 든든전세주택, 2년간 총 1.6만호 공급’(8월22일)에서 ‘공급’은 또 다른 뜻이다. 국토부에 물어보니 "정부가 경매를 통해 해당 빌라의 소유권을 확보하는 것을 공급 기준으로 잡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주택 하자를 고치고, 입주자를 모집해 실제로 입주까지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정부가 민간사업자와 계약한 걸 ‘공급’으로 정의한 경우도 있다. 정부가 민간이 지은 집을 사서 임대주택으로 운영하는 매입임대 정책이 그런 예다. ‘신축매입임대 2025년까지 11만호 공급’(8월8일)에서 ‘공급’은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민간사업자와 서류상 착공 계약을 맺은 것을 의미한다. 계약 후 허가를 받아 건물을 올리고, 다 지은 건물을 LH가 인수한 다음 분양해서 서민들이 살기까지 최소한 2~3년은 더 걸린다.
"‘공급’이 여러 의미로 쓰여서 각자 다 다르다"는 국토부 고위관계자의 말처럼, 공급을 ‘입주’와 동의어로 생각하면 큰코다칠 일이다. 하루라도 빨리 많은 주택이 부동산 시장에 풀릴 거라는 걸 강조하고 싶은 것이 정부 의도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서로 다른 기준을 모두 끌어와 ‘공급’이라는 두루뭉술한 단어로 포장해 내놓는 건, 국민들이 부동산 정책을 이해하는 걸 방해할 뿐이다.
지난 석 달간 틈만 나면 발표했던 부동산 공급 대책보다, 은행 대출 규제가 시장에 훨씬 큰 영향을 주는 것만 봐도 구체적인 설명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실컷 만들어 놓은 부동산 공급 대책이 ‘언어의 문제’로 제 효과를 내지 못하면 국토부 입장에서도 밑지는 장사다. ‘3기 신도시 2029년까지 23만6000호 공급(×)→분양(○)’. 사람들이 단박에 알아채고 못 채고는 이런 한 끗 차이에 달려 있다.
심나영 건설부동산부 차장 sny@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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