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수능시험 격인 SAT는 수능시험보다 쉽게 느껴진다. SAT 출제자인 폴 윤 엘카미노 주립대 수학과 교수는 방송에 출연해 수능 문제를 접한 소회를 말했다. "한 문제를 풀어봤는데요. 제가 10분 이상을 풀더라고요. (사회자: 너무 어렵죠?) 네. ‘이런 형태는 미리 훈련이 안 되어있다면 (풀기가) 불가능하다’라고 결론을 내렸어요."
수능의 킬러(초고난도) 문항이나 준 킬러 문항은 SAT 출제자까지 손들 정도로 어렵다. 교과 밖에서 출제되기도 한다. 이런 어려운 수능은 우리를 병들게 한다. 학생과 학부모는 사교육에 의존한다. 청소년 인구는 줄어드는데 사교육시장 몸집은 2000년 12조원에서 현재 26조원으로 커졌다. 대신 중산층의 노후는 위태로워진다. 학원·과외에 월 200만원 이상 쓰는 가정이 수두룩하다. 은퇴 자금이 줄줄 샌다. 이 모습을 본 20~30대는 아이를 안 낳는다. 어려운 수능과 비대한 사교육, 불안한 노후, 세계 최저 출생률 간엔 높은 상관관계가 있다.
수험생은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 수능 경향을 따라가니 고교 중간·기말고사에도 킬러, 준 킬러 문항이 나와서다. 공부를 아무리 해도 안 된다고 좌절한다. 멀쩡한 학생이 수포자가 된다.
서울의 평균적 고교생은 전체 9등급의 중간인 4~5등급에 해당한다. 현 입시는 이런 중간값 다수를 루저로 만든다. 4~5등급으로는 통학 가능한 대학 진학이 불투명하다. 어려운 수능이 서울 중심의 대학 서열화를 만들어 전국 수험생이 인서울 대학으로 몰리기 때문이다. 비수도권 학생은 자기 고장 대학 대신 많은 돈을 들여 서울에 와야 한다. 수능점수에 의한 서열화는 인서울 대학의 국제경쟁력을 높이지 못한다. 비수도권 대학은 완전히 죽을 맛이고 지방소멸이 가속화된다.
‘시험이 난해해야 변별력이 생기고 공정이 구현된다’는 미신이 여전히 지배한다. 어려운 수능은 불공정을 조장한다. 비상식적인 초고난도 문항으로 의대냐 아니냐가 갈리는 것이 불공정이다. 출제자와 학원가가 결탁하는 것도 불공정이다. 지금의 변별력은 학원, 특목·자사고, 강남 등의 기득권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변질되고 있다.
폴 윤 교수에 따르면 미국 상위 25% 대학 지원자는 SATⅠ에서 1600점 만점~1580점을 받는다. 우리로 치면 서울대 의대, 연대 의대, 성대 의대의 합격선에 차이가 거의 없는 것이다. 그래도 미국에선 공정성 문제가 안 생긴다. 쓸데없이 난해하지 않고 기본에 충실한 SAT가 미적분·행렬·벡터를 포기하는 학생을 줄인다. 미 전국에 걸쳐 대학들의 경쟁력을 고루 높인다.
난해한 수능을 지양하는 건 담대한 접근이다. 사교육비 부담, 입시지옥, 노후 불안, 부동산 불평등, 지방소멸, 저출산 같은 심각한 문제를 완화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이 방향으로 나아갈 조짐은 없다.
대통령의 수능 난이도 발언 후 여야 공방으로 수능 난이도는 정치화됐다. 11월 수능이 조금 쉽게 나오면 야당은 물수능이라 비난하고 성난 수능 민심을 내세워 총선 승리를 노릴 태세다. 물수능 논란 이듬해 수능은 늘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런 논란을 원치 않는 정부는 ‘교과 외 초고난도 문항’을 ‘교과 내 초고난도 문항’으로 대체하는 선에서 수능 난이도를 예년 수준으로 유지할지 모른다. 어느 쪽이든 달라지는 것은 별로 없고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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