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회사에 지각하지 않으려고 서둘러 버스를 탔는데 한참 달리고서야 반대 방향임을 알았다 처음 본 길가 간판들을 무심히 읽다가 아득하니 흔한 도시 속을 달리다가 화들짝 이번을 놓치고 다음에 내렸다 길 건너 정류장으로 뛰어가 종점에서 출발하는 버스를 기다렸다가 멈춤을 모르는 시간을 다급히 확인했고 종점 다음 그다음 그다음의 다음… 가 본 적 없는 정류장들을 거쳐 올 버스를 기다렸다가 버스 도착 예정 시간을 확인했고 일 분이 지난 시간을 다시 확인했고 도착 예정 시간을 다시 확인했다가 오늘의 방향을 제대로 확인 못 한 나를 원망했다가 내가 한심했고 뭘 그리 잘못했다고 나를 용서할 수 없다는 듯이 일 분마다 마음의 멱살을 잡고 마구 흔들었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마음이 대체 뭘 어쨌길래 사소한 일에도 마음을 잡아다가 못살게 구는 건지 어제도 그저께도 그끄저께도 엊그저께도… 얼빠진 얼굴로 같은 정류장에서 출근하고 건너편 같은 정류장으로 퇴근했다 바쁘냐고 안부 묻는 사람이 도리어 바쁜 사람이듯 한 번도 한가하냐고 물어본 적이 없었다 오늘의 십 분 한갓진 정류장에서 나를 확인했고 홀연히 반대 방향으로 마음이 도망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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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 詩] 오늘의 정류장/윤석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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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는 게 괜히 부잡스럽다고 느껴질 때면 아무 버스나 타고 종점까지 가곤 했었다. 가 봐야 유다를 것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말이다. 그래도 조금씩 낯설어지고 꼭 그만큼씩 한가해지는 버스 창밖을 보며 이리 흔들 저리 흔들 툴툴거리면서 가다 보면 어느 순간 희한하게도 아무 생각이 없어지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왜였을까? 딱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어쩌면 그 두서너 시간 남짓이 내겐 여행이었던 듯싶다. 여행이 뭐 별건가, 그냥 갔다 오면 그만이지. 그리고 그때마다 새삼스러울 것 없이 배운 바는 내가 떠나온 데가 곧 돌아가야 할 곳이라는 사실이었다. 요컨대 내가 서 있는 그곳이 언제나 종점이자 곧 기점이었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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