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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火요일에 읽는 전쟁사] 우리나라 박물관엔 왜 구한말 무기가 거의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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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일제가 압수한 항일의병들의 화승총 모습(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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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 보통 다른나라에 방문해 그 나라의 박물관이나 전쟁기념관 등을 찾아가보면 18세기 이후 무기들이 대부분 전시돼있다. 시대가 가까울수록 덜 훼손되고 원형으로 보존된 무기가 많기 때문인데, 특이한 점은 우리나라는 오히려 이때 무기 유물이 삼국시대나 상고시대 돌칼 유물보다도 만나기가 힘들다. 특히 구한말의 무기나 군복들은 매우 희귀한 유물로 취급받는다.


우리나라 박물관들이 이런 아이러니를 안고 있는 이유는 구한말 일제가 벌인 '총포급화약단속법(銃砲及火藥團束法)'이라 불리는 무기사냥을 당했기 때문으로 알려져있다. 1907년 8월1일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해산한 일제는 의병 저항을 막는다며 1907년 9월6일부터 조선 전국의 모든 무기를 압수, 폐기시킨다. 이로 인해 구한말까지 조선의 민간에서 보유하고 있던 무기 유물들은 거의 대부분 씨가 말라버리게 됐다.

일제가 두 달여동안 벌인 이 강압적인 무기 사냥에 따라 도검, 활, 갑옷 등 10만여점이 몰수당했고, 화승총 등 구식총기도 1만정 이상이 압수당했다. 화승총에 사용되는 화약과 탄약 등도 36만근 이상이 몰수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제는 여기서 더 나아가 '성벽처리위원회'까지 설치해 조선 각 도시에 있던 성벽들을 일제히 허물어버렸다. 의병들이 지방에서 성벽을 근거지로 활용할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처사였다.


영국 데일리메일 기자 프레더릭 매켄지가 찍은 구한말 의병의 모습(사진=독립기념관)

영국 데일리메일 기자 프레더릭 매켄지가 찍은 구한말 의병의 모습(사진=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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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조치는 오히려 역효과를 낳는다. 일제의 무기사냥은 평안도나 함경도 국경 일대에서 청나라를 통해 무기를 밀수해와 사냥으로 생계를 이어나가던 포수들에겐 치명타였고, 이들이 대거 의병조직에 합류하면서 정미의병의 규모가 커지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옛 대한제국의 지방군이었던 진위대(鎭衛隊) 병사들도 의병조직에 속속 합류하면서 구한말 최대 규모의 의병전쟁이 전개되기 시작한다.


1907년 11월 경상북도 문경의 유학자인 이인영(李麟榮)을 중심으로 이른바 '13도 창의군'이 결성됐으며 이듬해 1월 약 1만의 병력이 모여 서울진공작전을 벌이기도 했다. 의병들은 경기도 양주를 중심으로 집결, 전국 의병진의 연합을 호소했고, 각국 공사관에도 격문을 보내며 격전을 이어갔으나, 상호 집결에 실패하고 일제가 재빠르게 이동하며 공격하면서 분산, 각개격파됐다. 이후 의병부대들은 각자 지역으로 돌아가 항일의병전을 이어나간다.

1907년 당시 조선통감부의 집계에 따르면 조선 전국에서 의병 봉기 숫자는 약 7만여명, 봉기건수는 1450여건에 이르렀다. 1907년부터 경술국치로 국권이 피탈되는 1910년까지 3년간 의병은 약 14만8000여명이 봉기했던 것으로 집계됐고 1만6000여명이 사망하고 3만6000여명이 부상당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1909년 일제의 남한대토벌작전 당시 일제에 저항하다 체포된 의병들의 모습(사진=우리역사넷)

1909년 일제의 남한대토벌작전 당시 일제에 저항하다 체포된 의병들의 모습(사진=우리역사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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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군대해산 직후 대한제국의 병탄을 모색하던 일제는 전국적으로 벌어진 의병활동에 병탄계획을 뒤로 미루고 의병과 전쟁에 돌입했다. 일제는 1904년 러일전쟁기부터 육군 1개 사단을 2년 단위로 교체 주둔하는 한국주차군을 주둔시키고 있었으며 병력을 추가해 3년여에 걸쳐 격렬한 전쟁을 벌여나간다. 일제는 1909년 9월부터 11월까지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이라 불리는 무자비한 학살전을 벌였으며 호남지역 전체를 포위, 3단계에 걸친 섬멸작전을 펼친다.


한반도 지리에 익숙치 않던 일제의 토벌작전을 도운 것은 친일세력들과 연결된 일진회 밀정들이었다. 이들의 밀고와 도움으로 100여명의 의병장들이 희생됐고, 의병세력도 점차 고립되며 각개격파 당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무기를 빼앗기고 다수의 동료 의병들이 희생됐음에도 살아남은 의병들의 항일전쟁은 해방이 올 1945년 8월15일까지 계속해서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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