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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독서] '국화 옆에서·꽃…' 불교 철학이 곧 詩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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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박병희 기자]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와 김춘수의 '꽃'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시구 하나쯤은 외우고 있는 애송시들이다. 겉으로 드러나 있지 않지만 이 두 시에는 불교의 철학이 연관돼 있다.


'국화 옆에서'의 화자는 한 송이 노란 국화꽃이 피는 동안 잠을 자지 못한다. '인드라망'이라는 불교 용어가 있다. 인드라망은 인도 신화에서 인드라 신이 살고 있는 세상을 수호하기 위해 하늘을 덮고 있는 그물을 뜻한다. 화자가 국화꽃 때문에 잠을 자지 못하듯 인드라망은 우주 삼라만상이 그물코같이 연결된 한 몸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김춘수는 '꽃'에서 서로에게 잊히지 않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바람을 노래한다. 내 마음 속에 들어와야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라는 일체유심조의 불교적 인식론이 담겨 있다.


'현대시에 나타난 불교'는 문학평론가 이경철이 우리 현대시를 불교적 관점에서 살핀 평론집이다. 이경철은 지난 30여년 동안 문학기자와 문예지 편집자로 활동했다. 그는 불교는 우리 민족의 심성을 나타내는 문화적 원형(原型)이며 우리 시 역시 불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경철은 이 책에서 20세기 초 최남선과 이광수 2인 문단 시대부터 시인 2만명에 이르는 현재까지를 시대 순으로 정리하고 주요 시인 55명의 시 속에 나타난 불교적 양상을 깊이 있게 살핀다.

[기자의 독서] '국화 옆에서·꽃…' 불교 철학이 곧 詩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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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한의 '불노리'는 한국 현대 자유시의 효시로 평가받는다. 이 시는 사월초파일 평양 대동강의 관등놀이를 소재로 임이 떠난 후의 상심을 표현했다. 만해 한용운은 불교 세계관에 바탕을 둔 참여시를 썼고 백석은 '여승', 조지훈은 '승무', 신석초는 '바라춤'이라는 시를 남겼다. 조지훈은 1942년 말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서울을 떠나 오대산 월정사로 거처를 옮겼고 신석초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3학년 때 병이 나 석왕사에서 요양하며 문학에 빠져들었다.

이형기는 대학에서 불교학을 전공했다. 그는 '낙화'에서 공(空)과 적멸의 불교 철학을 담아 사랑하는 연인과의 이별의 아픔을 단호한 결별의 미학으로 승화시켰다.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로 시작하는 신경림의 '목계장터'는 게송(불교의 시의 한 형식)이 아닐까 싶은 착각이 들 정도다. '목계장터'는 '나는 하늘이 되고 하늘은 구름이 되고 구름은 비가 되고 비는 강이 되고 강은 들꽃이 되고 들꽃은 바람이 되고 바람은 잔돌이 되고 잔돌은 다시 내가 되는' 불교의 윤회 사상을 담았다.


이처럼 우리 시에 불교적 사상이 많이 담긴 이유는 불교가 오래전 토착화돼 자연스럽게 우리 문화에 수용됐기 때문이다. 시를 쓰는 일이 불교의 참선을 수행하는 것과 같다는 예로부터의 인식도 영향을 줬다.


송나라 시인 오가(吳可)는 '학시시(學詩詩)'에서 "시 배우는 일은 참선을 배움과 같다(學詩渾似學參禪)"고 썼다. 오가는 스스로 온전히 깨쳐야 하고, 전범(典範)에 매이지 말아야 원만함에 이를 수 있다는 점에서 시와 선은 같다고 했다. 송나라 시론가인 엄우(嚴羽)도 '창랑시화'에서 방법론이나 그 요체에서 시와 선은 같다고 했다. 불교계와 시단에서는 오래전부터 '시와 선이 하나다'라는 뜻의 '시선일여(詩禪一如)'가 통용됐다. 이경철은 우리 현대시의 세 갈래인 순수서정시와 실험시와 참여시의 대부 격인 서정주, 김춘수, 김수영의 시세계에도 알게 모르게 불교가 스며들어 있다고 주장한다. 또 나태주, 정호승, 김초혜, 이성복, 황지우 등 최근 시인들의 시에서도 어떤 불교적 관념이 담겨있는지 살핀다.


'현대시에 나타난 불교'는 시를 새로운 시각에서 해석해볼 수 있는 여지를 준다. 이경철은 시뿐 아니라 시인 55명의 삶 전체를 조망해 읽는 재미를 더한다. 시 속에 시인의 삶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시를 통해 평소 접근하기 어려웠던 불교의 철학과 계율을 배울 수 있다는 점도 이 책을 읽는 재미다.








박병희 기자 nu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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