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비비] 못다 핀 꿈, 실크로드 수송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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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진 창업주 조중훈 회장은 말년에 이렇게 말했다. "내가 전 세계 곳곳을 바다며 육지며 항공으로도 누벼봤지요. 남미도 브라질 상파울루 노선을 만들어 24시간 걸리는 코스로도 다녀왔고…." 기자가 내친 김에 물어본다. 더 가보고 싶은 곳이 있으십니까. 생각에 잠겼던 조 회장은 "실크로드요. 우선 현지를 가서 둘러보고 미래 사업도 생각해보고 하면 좋겠는데…."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짓는 조 회장 비껴 접견실 벽면에 큰 액자로 올린 휘호가 눈에 들어온다. 수송보국(輸送報國). 1996년께 당시 한진그룹 담당 기자였던 필자 마음에는 그룹 총수 인터뷰 때 보았던 그 한자 성어가 여태 아로새겨져 있다. 우리 기업들 역사를 다루게 될 때면 한진의 수송보국이나 포스코의 제철입국은 단연 단골 메뉴다.

한진이 부여잡았던 수송보국 모토는 얼마나 진척돼갔는가? 1세대가 건넨 실크로드 수송보국은 또 21세기 들어 어디쯤 가고 있나? 이에 대한 기업사 비평과 냉정하고 객관적인 성과 측정, 원인 분석이 요구되는 시점이 바로 지금이다. 수송보국 바통을 이어받았던 조양호 회장이 급서한 여기가 한진과 한국을 함께 묶어 평점 올리기 딱 알맞은 지점이다.


시초에 한진의 수송보국은 비즈니스 모델에 가까웠다. 한국전쟁 때 발아한 조중훈의 한진이었으니까. 미군부대 GMC 트럭 한 대로 도맡은 사업 영역이 곧 수송이었다. 영어로는 로지스틱스(logistics). 물류 사업 하면 떠오르게끔 차려낸 간판이 곧 수송 한진이었다.

수송에 이은 보국도 비즈니스 모델이자 전략 로드맵에 맞춘 개념이었다. 군용 트럭을 석 대, 열 대로 차츰 늘려나간 조 회장은 선글라스 쓴 마도로스라는 어린 시절 꿈 그대로 한 척, 두 척 선박으로 해운 수송을 접수하는 데 성공했다. 그 다음 국적기 대한항공으로 비행기 한 대, 두 대, 백 대로 가는 항공 수송까지. 요즘 표현대로 물류 전체를 씹어먹기 시작했다.


이렇게 완성된 육ㆍ해ㆍ공 수송 물류 비즈니스에서 1950~1980년대 국가의 역할은 기업과 분리된 적이 없었다. 총자본으로서 국가 그 자체였다. 대기업 그룹으로 올라 선 한진은 셔틀런(왕복달리기) 보국의 진수를 보여줬다. 한진은 수송 물류로서 고용하고 세금내고 공공 인프라와 군수 사업 등을 거뜬히 해낸다. 이에 국가는 국제선 항공권 사업도 주고 초고가 부가가치 액화천연가스(LNG) 수송선박 발주와 금융까지 해결해주는 쌍방향 보은과 보답이 이루어졌다. 수송보국 몸짓 하나가 산업자금 보업, 금융보험 보업, 세금우대 보업, 수주물량 보업으로 되돌아오는 왕복 10차선 고속도로 위를 정계와 재계 역군들은 무한 질주했다.


그렇게 한진의 수송보국은 한강의 기적과 함께 정경유착 부패라는 빛과 그림자 양면성을 고스란히 잉태한 영욕의 상징과도 같은 사자성어가 돼버렸다. 이러한 맥락 속에 있다 보니 지금 한진에 빗발치고 있는 수위 높은 험담과 정치적 발언들을 보면 수송보국은 온데간데없고 뭔가 국민보복이라는 살풍경이 먼저 떠오를 정도가 돼버렸다.


과거 한진이 국가에 보은하고 국가가 한진에 보답하던 오랜 후진국 시절이 지나가자마자 이제 국민 일부가 기업 혹은 서로 다른 국민에게 보복하려는 어지러운 때가 찾아오고야 말았다. 한진 일가, 특히 재벌 3세대 불온한 가족들이 국민과 주주, 이해관계 당사자에 누를 끼쳤던 점은 수송보국을 욕보인 중대 과오로 다스려져야 할 일이다. 말하지 않아도 법정과 주주총회, 이사회, 노사관계에서 주주책임을 묻게 돼있다. 이제부터 필요한 문화 선진국 한국인의 책무는 못 다한 수송보국의 초심과 정신을 고귀한 현실 새 자산으로 키워내는 과업이다.


어쩔 수 없는 사업 전략으로 포석을 둔 벤처기업 한진의 슬로건 수송보국은 수십 년 성상을 거치면서 이미 한국 사람들 모두에게 거대한 뿌리로 스며들었다. 재벌의 금전적 폭리나 특혜, 횡령 비리, 갑질이 부각되는 그 너머에 이미 세계 시민과 세계 경영이라는 무한대 소프트 파워가 축복이 돼 이 땅에 가만히 내려앉았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 겨드랑이에 우리의 날개를 달아 주었다.


관리의 삼성, 기술의 현대도 못 하던 글로벌화 경험과 의식, 호연지기를 오직 한진만이 한국민 정수리에다 쏟아부어주었다. 그걸 알면 부끄러운 인터넷 상호 비방과 이념 과잉 물어뜯기를 당장 끝내고 한진그룹 멱살 아닌 어깨를 걸머지고 새 대륙 새 지평을 찾아 나서야 한다.


창업주 조중훈이 뜻한 실크로드 수송보국이 바로 그 미완성 과제이자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이다. 섬이 된 한반도 남쪽에서 웅크린 볼품없던 한국을 육ㆍ해ㆍ공 우리의 날개로 지구촌을 누비게 해준 한진의 이상과 명성을 한낱 사업전략 수송보국으로만 주저앉힐 순 없다. 일가가 미우면 기업도 미워하는 해괴한 보복 심리로 한국 경제를 자해하는 꼴도 못 보겠다.


한진이 개척한 길 그 위에 곧추서서 실크로드가 풍기는 유라시아 대륙, 전 지구적인 큰 역할을 키워 성공해야만 한진이 보은했고 한국민이 다시 나라와 미래에 보답하는 진정한 수송보국이 실현될 수 있으리라 믿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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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민 성신여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한국문화경제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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