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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박정자씨가 인정한 테레시아스 '소리꾼 정은혜'

최종수정 2019.02.19 11:08 기사입력 2019.02.19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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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살 때부터 소리 배워…판소리 다섯 마당 여덟 번 완창
세 번째 연극 '오이디푸스'에서 단단한 소리로 신탁 전해
"연기·음악 통하는 면 있어…장르 한계없는 소리꾼 꿈꿔"

[사진= 샘컴퍼니 제공]

[사진= 샘컴퍼니 제공]


[아시아경제 박병희 기자] 배우 박정자(77)씨는 지난 1일 예술의전당에서 '오이디푸스' 공연을 본 후 '테레시아스' 연기에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자신이 2011년 테레시아스를 연기했기에 누구보다 테레시아스 연기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었다. 기획사 관계자에게 물어 배우가 소리꾼 정은혜(35)임을 확인한 후 반가움에 등짝을 후려쳤다. 너무 잘 했다는 뜻도 담겼다. 둘은 2013년 한태숙 연출(69)의 연극 '단테의 신곡'에 함께 출연했다. 박씨가 프란체스카, 정씨가 베아뜨리체를 연기했다.


오이디푸스의 주인공은 황정민(49)씨다. 하지만 서재형 연출(49)이 강조한 소리의 중요성을 감안하면 정은혜는 또 다른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서재형 연출은 관객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오이디푸스를 원했다. 그는 배우들에게 "우리 장모님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여야 한다"고 했다. 대사 등 소리에 특히 신경을 썼다.

테레시아스는 오이디푸스에서 신탁의 비밀을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 그의 대사에 따라 오이디푸스의 감정이 요동친다. 그래서 이야기의 전달에서 테레시아스의 목소리는 중요하다. 지난 15일 예술의전당에서 정은혜를 만났다.


테레시아스는 맹인 예언자다. 인간과 신의 경계에 있는 존재. 테레시아스의 음성은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면서도 관객의 귀에 정확히 전달되는 사람의 목소리여야 했다.


토해내는데 익숙한 소리꾼 정은혜는 대사를 꾹꾹 눌러밟아 전달한다. "음악을 했던 사람이고 대사에 익숙한 사람은 아니다. 너무 이질적으로 다가가면 안 될것 같았다. 너무 튀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게 하려고 노력했다." 대사는 단단해졌다. 울림이 있으면서도 정확하고 묵직하게 관객의 귀에 꽂힌다. "테레시아스가 나이가 있는 인물이기 때문에 저음을 많이 썼다. 질감적으로 좀더 허스키하더라도 대사가 꼭 전달되도록 하기 위해 신경을 많이 썼다."

그는 질감이라는 단어를 반복해서 썼다. 그가 말하는 질감은 감정을 어떻게 소리에 풍성하게 담아내느냐에 대한 고민이었다. "판소리를 할 때 여러 인물을 소화해야 한다. 서사를 계속 노래로 얘기해주면 관객이 굉장히 지루해할 수 있다. 변검술 하듯 목소리를 바꿀 수 없기 때문에 정서를 전달하는데 신경을 많이 썼다."

그가 말하는 정서는 서재형 연출의 의도와 맞닿아있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운명에 희생되는, 한을 지닌 인물이다. 한을 담아내야 했기에 기계적인 음은 배제됐다. 오이디푸스가 테레시아스를 만나는 장면에서 까마귀들이 '까악~' 하는 소리도 배우들의 육성을 썼다. 정은혜는 서재형 연출이 보기에 테레시아스에 가장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정은혜는 "기계를 쓸 수도 있었지만 아날로그적이고 진솔한, 원초적인 육성을 원하셨던 것 같다"고 했다. 서재형 연출은 소리에 관해서는 배우들이 정은혜에게 배워야 한다고 했다.


정은혜는 일곱 살 때부터 소리를 배웠다. 전주 태생인 그의 어머니는 사당패가 좋아 소리를 배우고 싶었으나 부모님의 반대로 꿈을 이루지 못했다. 대신 딸에게 소리꾼의 꿈을 투영했다. 어머니는 일곱 살 때 집 근처 국악원에 정은혜를 데려가 "우리 딸 명창 만들어주시오"라고 했다. 부안이 고향인 아버지도 소리에 관심이 많았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소리를 배우게 했다. 정은혜는 부모님 덕분에 스파르타식으로 소리를 배웠다.


정은혜는 구전되는 판소리 다섯마당 수궁가,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적벽가를 모두 완창 발표했다. 적벽가, 심청가, 춘향가를 두 번씩 해 완창 횟수는 여덟 번이다.


그는 2013년 1월 10년 만에 뽑은 국립창극단 신입 단원으로 입단했다. 입단 5개월 만에 창극 '메디아'에서 주인공을 맡았다. 그때 정은혜를 주인공으로 발탁한 이가 서재형 연출이었다.

[사진= 샘컴퍼니 제공]

[사진= 샘컴퍼니 제공]


정은혜는 단테의 신곡으로 연극 무대에 데뷔했다. 지난해 '리처드 3세'에 출연했고 이번이 그의 세 번째 연극 무대. 아직 익숙하지 않다. "모두가 황정민 배우에게 선배라고 하는데 아직 그렇게 부르지 못한다. 조심스럽다. 배우들에게 누가 되지 않았으면 한다."


황정민씨에게 선배라고 부르지 못한다는 말에 그가 연극에 재미를 느끼고 있다고 느껴졌다. "판소리는 컨디션이 좋든, 나쁘든 오롯이 혼자 오랜 시간을 버텨내야 하는 외로움이 있다. 연극은 역할을 나누기 때문에 부담을 덜 수 있다. 협업이기 때문에 호흡을 주고받는 생생함이 있다. 합이 잘 이뤄졌을 때 짜릿하다. 물론 호흡이 불편할 때는 애가 탈 때도 있다."


그는 판소리도 여러 인물을 목소리로 이야기해주는 것, 소리로서 배우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음악을 하며 채워지지 않는 부분들을 연기를 통해 해소하는 면이 있다. 그렇게 하면 음악에서 또 다른 것들이 보인다. 양 쪽을 하면서 표현이 조금 더 풍성해지는 것 같다. 음악만 하다 보면 헛헛하고 힘든 부분이 있는데 연기를 하면서 음악을 또 배운다. 연기도 음악과 다르지 않구나. 긴장과 이완이 반복되는구나. 예술이 통한다는게 이런 거구나라고 배운다. 좋은 공부가 된다."


그는 2년간 국립창극단에서 활동 후 독립해 '정은혜 컴퍼니'를 만들었다. 음악에 대한 실험을 계속 하고 있다. 아시아 민요 프로젝트 '여인의 시간'은 2015년 '파리 여름 축제'에 초청돼 공연했다. 2017년 12월에는 판소리 음악극 '단테 신곡'을 공연했다. 다양한 소리의 질감을 통해 단테의 신곡 지옥편을 음악으로 표현했다.


그는 "장르의 구분 없이 소리를 하는 확장형 소리꾼이고 싶다"고 했다.




박병희 기자 nu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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