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은 낙엽에서 부드러운 냄새가 난다


 당신은 나를 알지 못한 채
 누군가의 얼굴을 길게 그렸다
 보석처럼 빛나는 젖은 낙엽에서
 가느라단 비명처럼

 정오의 종소리가 울렸다
 당신의 등이 지진처럼 흔들리며
 무너져 내렸다
 이렇게 투명해도 되는 걸까 우리는
 이렇게 자꾸만 열리는


 푸른 문을 많이 갖고 있어도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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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엽을 밟으면 젖은 발자국
 젖은 발자국을 남기며 사라지는 우리에게는
 죽은 잎사귀들이 살아간다고 믿어서
 그들에게 무게를 지우고
 천천히 사라지는 우리에게는

[오후 한 詩]십일월/박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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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이 있을까
 그런데도 열리는 문은 무엇일까
 저 차갑고 선명한 문은
 왜 닫히지 않는 걸까


 
■십일월은 묘하다. 늦은 가을도 아니고 이른 겨울도 아닌 십일월은 그저 십일월이다. 그저 십일월이라서 십일월은 쓸쓸하다. 쓸쓸하긴 한데 그 쓸쓸함은 물기 하나 없는 쓸쓸함이라서 곧 부서져 버릴 것만 같은 쓸쓸함이다. 그렇다. 십일월은 자꾸 부서져 내리고 무너져 내려 모든 게 사라지고 사라지려 하는 때다. 또한 십일월의 햇살은 차고 투명해 사라지고 있는 것들을 결코 숨기지 않는다. 이 세상이 통째 이 세상의 바깥으로 사라지고 있는 십일월. 그 안에 당신과 내가 있다. "저 차갑고 선명한 문" 앞에 우리가 있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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