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羚羊)은 풀이나 새순을 뜯어먹고 사는 소과의 동물이다. 반추(反芻) 동물로서 생김새는 염소 또는 사슴과 비슷하고 구대륙에 분포한다. 소ㆍ양ㆍ산양 등은 영양의 무리에 포함하지 않는다. 영양은 아프리카의 야생을 소개하는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에 자주 등장한다. 주로 사자나 하이에나, 악어 같은 육식동물의 먹잇감 역할이다.
영양은 아주 오래전부터 인간의 시야에 들어왔나 보다. 텔레비전의 브라운관에 앞서 성경에 보인다. 예언자 이사야는 예루살렘에 닥쳐올 심판을 경고하면서 기진맥진한 상태로 그물에 걸린 영양을 예루살렘 주민에 비유한다. "너의 자녀들은 주님의 진노와 책망을 하도 많이 받아서, 그물에 걸려 있는 영양처럼 거리 모퉁이 모퉁이마다 쓰러져 있다."(사 51:20).
그러나 한없이 약한 영양도 사람보다는 강하다. 영양의 새끼는 태어나자마자 일어서며 곧 걷고 달릴 수가 있다. 대부분 초원에서 어미의 태를 열고 나오는 놈들이기에 약한 몸을 숨길 곳이 없다. 그러니 맹수들로부터 살아남으려면 빨리 다리에 힘을 주고 달릴 수 있어야 한다. 태어나서 눈도 뜨지 못하는 인간에 비하면 얼마나 강한 놈들인가.
인간은 목을 가누고 몸을 뒤집고 기어 다니다 기어이 일어서는데, 돌은 되어야 비로소 걷는다. 겨우 두 다리로 선 아이는 달 표면에 내려선 우주인들처럼 부자연스럽게 뒤뚱거린다. 달 표면을 걷는 인간은 막 태를 열고 나와 대지를 딛고 일어서려 애쓰는 영양을 닮았다. 달에 토끼가 살고 토끼를 먹이로 삼는 맹수가 없었기에 망정이지 큰일 날 뻔했다.
그러나 그 다리에 힘이 고이고 마침내 제 마음대로 걷거나 달리게 되었을 때 인간은 이미 지상의 동물이 아니다. 그는 우주의 지평선을 바라보겠기 때문이다. 베네치아 청년 마르코 폴로는 세상의 끝을 짚고 돌아온 사나이다. 이븐 바투타는 아프리카에서 중동과 인도를 거쳐 중국을 다녀왔다. 헤로도토스에게 여행은 곧 역사가 아니었는가.
바퀴와 돛, 로켓의 불꽃은 인간의 신체인 다리를 대신한다. 곧 인간 신체의 확장이다. 신체의 확장은 의식의 확장으로 직결된다. 길 위에 선 자는 그 자체로서 곧 미디어가 된다. 조개와 지팡이를 지니고 다니는 나그네의 수호자 성 야고보는 복음의 미디어가 아닌가. 전령신 헤르메스가 또한 여행자의 수호신임은 어떤 의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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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그러니 인간의 두 다리는 먼 곳에의 그리움을 숙명으로 새기고 나왔으되 그리움이란 곧 꿈을 말함이라. 꿈에서 미래가 생겨나느니 닐 암스트롱이 비틀거리며 바라본 것이 죽은 별의 먼지뿐이었겠는가. 그는 우주의 지평선을 보았고, 그것이 곧 미래임을 알았기에 외쳤으리라. "한 인간의 작은 걸음, 인류의 거대한 도약(That's one small step for a man, one giant leap for mankind)."
시월도 저물어간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 가을이 가득 찼다(윤동주). 곧 '잊혀진 계절'을 노래해야 하리라. 시간이 이토록 빠름은 우리가 우주 속에서 산다는 증거다. 당신은 어디를 걷고 있는가. 당신이 어느 곳을 걷고 있든 누구와 함께이든 당신이 걷는 그 길이 우주의 지평선이며 시간의 화살 위이며 당신의 꿈이다. 그렇다, 그토록 그리운 우주의 저편이다. 문화스포츠 부국장 huhb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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