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상도 정치부 차장] 한국사에서 '대왕'으로 불리는 사람은 흔치 않다. 광개토대왕과 세종대왕이다. 그리고 '사자의 용맹과 여우의 지혜'라는 마키아벨리적 군주상에 걸맞은 군주가 한 명 더 있다. 호사가들은 이미 그를 대왕이라 부른다. 조선 22대 국왕인 정조 이산(1752~1800)이다.


이런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곤 한다. 정조는 과연 성군(聖君)이었을까.

경국대전 체제를 끝내고 행정 분야를 세분화한 정조의 트레이드 마크는 단연 '탕평'이다. 규장각, 수원 화성, 비(非)양반 문신의 중용 등 그의 업적은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다.


하지만 탕평은 양날의 칼이었다. 조선 후기 최대 전성기를 구가했지만 정조의 치세는 조선에 약이 아닌 독이 됐다. 그의 사후 100여년 만에 조선은 멸망한다. 탕평이란 이름으로 국왕 개인에게 권력을 집중한 것이 화근이었다.

군신 간 견제와 균형은 무너지고 한때 국왕에게 집중됐던 권력은 정조 사후 고스란히 외척에게 넘어간다. 세도정치가 기승을 부리면서 권력은 부패의 전철을 밟는다.


정조를 둘러싼 논란은 또 있다. 18세기 조선을 압축하는 코드인 정조는 군주 앞에 '계몽'과 '절대'라는 모순된 수식어를 달고 있다. 유교적 계몽절대군주라는 평가도 있지만 여기에는 다소 문제가 따른다. 서유럽의 절대군주들은 시민ㆍ명예혁명으로 종말을 고했고, 동유럽의 계몽군주들은 계몽주의의 외피를 입었으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백성을 억압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가 대표적이다.


정조도 즉위하자마자 박지원의 '열하일기'와 같은 참신한 문장을 비판하며 문체반정(文體反正)을 주도했다. 또 창덕궁 북쪽 후원의 대보단(大報壇)에 유난히 집착했다. 이곳은 사라진지 100년도 더 지난 명나라 황제에게 '큰 은혜를 갚는다'며 조선의 국왕이 머리를 조아리던 제단이다.


의리를 강조하면서 청이 현실에서 주도하던 새 국제질서에 불만을 드러낸 셈이다. 다만 이런 정조는 대화와 상식이 통하는 군주였다. 유연한 보수였던 것이다.


요즘 정치권이 시끄럽다. '적폐 청산'을 앞세운 새 정부의 과거사 바로잡기는 때아닌 정치 보복 논란을 불러왔다. 국정농단 주체들의 적반하장식 태도에 피해자들은 그저 가슴이 먹먹할 따름이다.


하지만 새겨들어야 할 말도 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빈발하는 지난 정권의 단죄는 후진국에서 주로 일어난다. 한 야당 정치인은 "이 정부는 반대 의견을 개진하면 무조건 '촛불민심'을 들먹이며 묵살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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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가 오늘날 한국정치에 갖는 의미가 있다면 합리적 상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오상도 정치부 차장 sdo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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