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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뽀개기]난 죽었다고 시작하는 소설…반수면상태에서 글 쓰는 '영매술 작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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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레지스탕스였던 로베르 데스노스…초현실주의 소설 '자유 또는 사랑' 읽어보니

[신간뽀개기]난 죽었다고 시작하는 소설…반수면상태에서 글 쓰는 '영매술 작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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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1900년 7월4일 파리출생. 1924년 12월13일, 지금 이 글을 쓴 날 파리에서 사망."

저자가 스스로 이 글을 쓰며 죽었다고 이야기하면서 출발하는 소설은 매우 드물다. 더구나 이 소설은 주인공들은 있는데 우리가 흔히 아는 서사구조가 없으며 장소도 배경도 뒤죽박죽이다. 독백을 했다가 또 다른 인물이 갑자기 등장했다가 사라졌다가 하면서 마치 정신없는 꿈 한편을 꾸는 것과 같은 분위기다.
'자유 또는 사랑'의 모든 내용은 이런 식이다. 기존 소설에 익숙한 독자들은 매우 불쾌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애초에 평범한 '책'이라 생각하지 않고 끊임없이 연결되는 초현실주의, 다다이즘(dadaism) 그림을 글로 본다고 생각하며 넘겨야 그나마 편해진다.

이 진입장벽이 매우 높은 책의 저자는 초현실주의 운동의 대표자인 로베르 데스노스(Robert Desnos)다. 보통 초현실주의라고 하면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 등 화가부터 떠올리지만 원래 초현실주의 운동은 문학운동에서 출발했다.

초현실주의는 1차 세계대전 이후 기존의 과학만능주의, 기계론적 세계관 등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여러 사조들 중에 하나다. 비평가이자 의학도 출신인 앙드레 브르통(Andre Breton)이 초현실주의 그룹의 수장으로 활동했다. 브르통은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정신분석학에서 영향을 받은 초현실주의를 선언했는데 그가 주장한 '초현실(surrealite)'이란 순수한 심리적 자동기술법(automatisme)으로, 이를 통해 말이나 글, 그 외 어떤 방식으로든 사유의 실제 작용을 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성에 의한 모든 통제가 부재한 미학적이고 도덕적인 모든 선입견에서 벗어난, 사유의 받아쓰기를 뜻한다.
여기서 초현실주의 이미지를 얻기 위한 방법이 자동기술법이다. 이 기법은 브르통이 1차 세계대전 중 근무했던 병원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터득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정신병 환자들이 끊임없이 뱉어내는 독백과 같은 이야기들을 최대한 빠르게 받아쓰는 방식이다. 혹은 본인이 반수면 상태에서 꿈을 꾸면서 손이 가는대로 쓰는 방식을 뜻하기도 한다. 이는 고대 그리스의 오라클, 신관들이 행하던 영매술(靈媒術)과 흡사한 방식이다.

특히 데스노스는 이 영매술 방식에 능했다. 그는 반수면 상태에서 시를 읊는 능력을 지니고 있어 초현실주의 그룹 내에서도 독보적인 존재로 인식됐다. 하지만 그는 완전히 현실과 이별한 작가가 아니었다. 정치색을 상당히 띄고 있는 데스노스는 이 책 곳곳에도 자신의 정치적인 색채, 시대상황에 대한 의식 등을 담고 있다.

결국 브르통에게 데스노스는 그룹에서 축출됐고 이후 둘은 서로를 비난하기에 이른다. 데스노스는 이후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자 조국 독립을 위해 레지스탕스 운동에 투신하게 됐고 종전을 앞에 두고 1945년 나치 수용소에서 사망한다.(로베르 데스노스 지음/이주환 번역/읻다/1만1500원)

▶주요키워드: 초현실주의, 자동기술법, 다다이즘, 1차 세계대전

▶작문거리:

①봉건사회와 산업사회의 중첩: 이 책의 전반적 흐름은 해석하기 어려운 초현실주의 그림들의 모습과도 같이 흘러가지만 곳곳에서 당시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상징적인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대표적인 것이 '성 엘모의 불'이다. 갑자기 항해를 떠나게 된 주인공이 폭풍우 치는 밤 만나는 성 엘모의 불은 곧 닥쳐올 위험을 상징한다. 성 엘모의 불은 중세시대부터 지중해 지역 선원들이 성 에라스무스 성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일종의 미신이다. 원래는 폭풍우가 밀려오기 전에 돛의 끄트머리나 선미의 뾰족한 부분에 대기 중 전자가 들러붙어 도깨비불처럼 보이는 현상이다. 19세기 전반에 이미 자연현상의 일부임이 밝혀졌지만 여전히 당시 사람들은 이것이 폭풍우를 물리쳐주는 수호의 의미로 믿었다.

이러한 중세적 믿음을 상징하는 캐릭터와 함께 산업화의 상징으로 '베베카돔'과 '비방돔 미슐렝'도 등장한다. 카돔은 프랑스 비누상표로 이 회사의 갓난아기 광고모델을 베베카돔이라고 불렀다. 비방돔 미슐렝은 프랑스의 유명한 타이어 기업인 미쉐린 타이어의 마스코트 캐릭터다. 저자는 이 둘의 전쟁을 묘사하며 산업화가 만들어놓은 이 캐릭터들의 강력한 힘을 보여주고 있다.

②두 세계대전 사이의 정치적 모순: 이 책에는 곳곳에서 1,2차 세계대전 사이 정치체제의 모순에 대해 은연 중에 비판하고 있다. 19세기 프랑스 정치가인 라코르테르라는 인물이나 잔다르크를 형상화 한 잔 다르캉시엘 등 실제 역사 속 캐릭터들을 변형시켜 등장시키기도 한다.

책 속에서 라코르테르는 "1789년 절대왕정이 전복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1925년에는 절대적인 신성을 무너뜨려야하네. 신보다 더 강한 것들이 몇 가지 있단 말이지. '영혼의 권리선언'이 필요하고 정신을 해방해야하네"라며 "정신을 물질에 종속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물질을 영원토록 정신에 종속시키는 방식으로!"라고 정치체제에 대한 비판을 이어간다.

왕정, 독재국가 간의 이해관계에 따라 수천만명의 국민이 희생된 1차 세계대전을 겪었지만 여전히 혼란상태가 지속되고 있는 당시 정치현실이 드러나있다. 이후 대공황의 물결이 휩쓸면서 세계 전역에는 파시즘이 자리를 잡게 된다.

③'아버지'가 사라진 세대들의 초현실주의: 이러한 초현실주의 작품들은 유럽에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 일제강점기에 놓였던 우리나라에서도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이 있다. 시인 이상의 '날개', '오감도', '건축무한육면각체'나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등이 대표적이다.

당시 지식인들을 비롯해 양차 대전 사이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민은 '아버지'의 부재였다. 1차세계대전, 제3세계의 식민지 쟁탈전 등 각종 전쟁으로 징집 대상자였던 가장들이 대부분 사라진 세계에서는 기존의 기계론적 우주관, 진보사관, 낙천주의 등 아버지 세대들의 유산에 대한 반감이 강하게 일어났다. 특히 전체 아버지들의 절반 이상이 참호에서 숨을 거둔 프랑스는 더욱 심했다.

전통적인 왕정체제, 전통적인 농경문화, 가족체계까지 송두리째 무너뜨린 전쟁은 사상적인 공황상태를 일으켰으며 초현실주의뿐만 아니라 무정부주의, 공산주의 등 여러 사상의 탄생을 이끌었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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