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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권력의 공포에 머리를 조아린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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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초희 유통부장

이초희 유통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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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실'. 남들보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이 석자는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이름이 됐다. 종전까지 뉴스의 메인을 장식하던 북한의 '김정은'은 이제 신문의 인사·동정면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할 만큼 지명도를 잃었다.

정치권을 집어삼킨 '최순실 게이트'는 걷잡을 수 없는 형세로 치닫고 있다. 국회에서 정국을 주도하기 위한 정당들의 정쟁이 정리되기도 전에 최순실 폭풍은 재계로 번지는 형국이다. 최순실이 협박을 했든, 아니면 제 발로 돈 보따리를 싸 들고 갔든, 이미 상당수의 대기업들이 연루된 정황은 분명하다.
'정경유착'이라는 단어가 있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는 많이 사라졌지만, 이 나라 현대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권력이 기업에게 돈을 받고, 뒷배를 봐줬던 이 부적절한 관계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

우리나라의 기업들은 오랜 세월 동안 유독 권력에 약한 모습을 보였다. 장기간의 군사정권 시절을 지내오는 동안 권력은 단순히 공포가 아니라 언제든지 기업들의 목을 쳐낼 수 있는 칼이었기 때문이다.

기업들도 결국 권력에 기대어 몸집을 불려 온 게 아니냐는 비판은 당연히 나올 수 있다. 권력은 돈을 먹고 더 큰 괴물이 되고, 그 사이 많은 기업들이 재벌로 성장했으니 정경유착의 고리 속에서는 양쪽 다 죄인인 셈이다.
최순실은 우리 기업들이 한동안 잊고 지낸 권력의 공포를 떠올리게 하는 존재였을 것이다. 2~3세 경영인으로 세대교체가 한창인 시대에 난데없이 등장한 이 클래식한 '구악'은 기업들에게 과거 유신시대의 몸서리치는 기억을 떠올리게 했을지도 모른다.

최순실 게이트에 연루된 기업들은 벌써 초긴장 상태다. 지난 8일 검찰은 삼성 서초사옥을 본격 압수수색했다. 이날 삼성사옥 압수수색은 재계에 대한 본격적인 수사 신호탄으로 해석된다. 재계 총수들까지 소환 조사될 가능성도 나온다. 경기침체로 경영환경이 어려운 상황에서 청와대 압박에 억지 기금을 출연한 대기업들이 되레 검찰 수사까지 받는 상황이 된 셈이다.

이들을 변명해 줄 생각은 없다. 과오는 분명히 가리고 서릿발같은 심판도 이어져야 한다. 다만 모든 일에 뒤따르는 양면성을 봐야 한다는 점을 집고 넘어가자.

고려시대에 원종이란 임금이 있었다. 원나라에 굴복해 굴욕의 고려사를 시작하게 한 장본인으로 평가받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반세기 넘게 지속되며 나라를 거덜 나게 만든 전쟁을 끝낸 인물이기도 하다. 원종은 세자 신분으로 중국 땅에 건너가 몽골제국 제5대 칸이자 원나라의 시조인 쿠빌라이를 만났다. 이 인연으로 원종은 고려에 돌아와 왕위에 오른 뒤 몽고와의 전쟁을 끝내는 데 성공했다. 누구는 이를 굴욕의 역사로 칭한다. 하지만 강화도에 처박혀 불심(佛心)이 전쟁을 끝내줄 것이란 허망한 꿈을 꾸며, 민초들을 외면했던 당시 고려 위정자들을 옳다고 할 수 있을까?

최순실에게 돈을 바친 기업들은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거악(巨惡)이 없었다면, 최순실에게 굴복하는 차악(次惡)을 선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한류의 선봉에 서 있던 이미경 CJ그룹 부회장이 정권에 찍혀 하루아침에 자리를 내놨다는 의혹이 그냥 나온 얘기는 아닐 것이다. 목에 칼을 들이댄 살아있는 권력 앞에서 굴복하지 않을 수 있는 자들이 과연 몇이나 됐을까?

최순실과 얽힌 기업들은 이제 곤욕을 치를 것이다. 몇몇은 살아남겠지만 일부는 큰 낭패를 피하기 어려울 수 있다. 외압에 당당하지 못했던 것도 죄라면 죄다. 하루 빨리 그들이 이 얼룩을 털어 버리고 제자리로 돌아오기를 기원할 뿐이다.





이초희 유통부장 cho77lov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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