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라스푸틴과 공화국의 최순실
[아시아경제 나주석 기자]최순실 게이트 파문이 한국 사회에 충격을 안겨 준 이후 빈번히 등장한 역사 속 인물이 두 사람이 재조명받고 있다. 고려 말 공민왕 시절의 승려 신돈과 러시아 제정 말기의 파계 승려자 그리고리 예피모비치 라스푸틴 두 사람이다.
두 사람은 모두 종교 또는 종교를 가장해 최고 권력자 가까이에서 권력을 농단했다는 점에서 최 씨를 연상시킨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일각에서 의혹을 제기하듯 박근혜 대통령이 고(故) 최태민 씨와 그의 딸 최순실 씨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면, 신돈과 라스푸틴의 사례는 현재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영적 능력으로 권력자를 사로잡아 정치에 깊숙이 개입하고 문란한 생활로 물의를 빚은 점 등의 유사성을 들어 최태민은 종종 라스푸틴에 비교되곤 했다. 제정 러시아 말기의 요승 라스푸틴은 불치병인 혈우병으로 고생하는 황태자 알렉세이를 치료하며 황제 니콜라이 2세와 황후 표도로브나의 전폭적인 신임을 얻어 전횡을 일삼았다.
신돈과 라스푸틴은 종교라는 매개고리를 가졌다는 점, 두 사람이 살았던 시대는 각각의 왕조와 제정이 최후를 맞기 직전이었다는 점, 두 사람은 최고 권력자 가까이서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 닮았다. 하지만 두 사람이 활약했던 시기는 왕정 또는 제정이었다. 군주의 절대적 권력이 당연시되던 시절이었기에 최고 권력자가 누군가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면 그것 자체가 권력이 되던 시절이었다. 이 때문에 당시에는 '비선실세(秘線實勢)'라는 말도 없었을 것이다. 백성들이 신돈과 라스푸틴을 원망했다는 것은 두 사람이 '보이지 않는 존재'가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최순실 씨의 경우에는 박 대통령의 연설이나 국정 전반에 간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 대중에는 철저하게 은폐된 존재였다. 덕분에 의혹이 최 씨는 권력을 행사하되 책임들은 지지 않는 존재가 될 수 있었다. 그나마 최 씨가 신돈이나 라스푸틴과 달리 보이는 권력이 되지 못했던 것은 우리나라가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최고 권력자는 국민의 투표 때문에 선출되는 공화정을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권력 정당성 자체가 피치자의 지지를 바탕으로 하는 정체를 채택하고 있으므로 일반 국민의 상식과 다른 방식으로 정치가 진행될 경우 일반 국민이 이를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최고 권력자가 주요 장·차관을 자신의 친척이나 형제자매들을 임명하기 어려운 것은 이 때문이다.
대부분의 다른 나라에서도 최고 권력자의 자의적인 통치행위가 용인되지 않는 것은 이 같은 공화국의 통치원리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최 씨의 경우처럼 '비공식적'인 대통령의 권력작동에 대해서는 제동을 걸지 못했다. 즉 우리의 경우 공화국의 원칙은 공식적인 영역에만 통했고, 비공식적인 부분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이 일이 벌어진 것은 최고 권력자 주변의 협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형식적, 공식적으로는 공화국의 원칙을 내세우면서도 실질적으로는 공화국의 작동 원리가 통용되지 않은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정치지도자를 선출하는 과정에서도 변형된 제왕제의 유산이 그대로 작용됐던 것은 아닌지 점검해야 할 필요가 있다. 박 대통령의 가장 큰 정치적 자산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혈육이라는 점이다. 혈연을 바탕으로 한 과거 왕조의 정당성과 유사한 논리가 현대 정치에서도 통용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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