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서 분쇄됐나, 서울서 증발됐나…신상옥 영화와 현실의 '김형욱 최후'

그때그사람 - 36년 전 10월 7일 전 중앙정보부장 실종…여전히 석연찮은 미궁

한밤중 콘테이너를 싣고 서울에 도착하는 비행기 한 대. 그 콘테이너 안에는 전직 국가보안부 장관 박진욱이 갇혀 있었다. 현직 장관인 이상규가 미국에서 대통령의 비리를 폭로하는 회고록을 쓰던 그늘 납치한 것이었다. 이상규는 납치 성공을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대통령은 48시간 안에 박진욱을 회유하라고 한다. 뜻을 꺾지 않으면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게 자명한 상황. 하지만 박진욱은 부패한 독재정권에서 일했던 것을 참회하기 위해서라도 회고록 집필을 멈출 수 없다고 한다. 제법 흥미진진한 이 이야기는 신상옥 감독의 1994년 영화 '증발'의 내용이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영화에나 나올 법한 스토리가 아니었다.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어느 날 쥐도 새도 모르게 '증발'한 박진욱은 어떻게 됐을까.

영화 '증발'의 한 장면

37년 전인 1979년 10월 7일 프랑스 파리서 한 한국인 남성이 실종된 것은 실제 있었던 일이다. 50대 중반의 이 남성은 박정희 정권에서 6년 넘게 중앙정보부장을 하며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김형욱이었다. 이날 이후 김형욱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영화 '증발'은 김형욱이 납치돼 한국으로 끌려왔을 것이라는 상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그렇게 짐작한 배경은 당시 김형욱의 행보였다. 그는 63년 7월부터 중정부장으로 일했지만 69년 경질된 뒤 73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망명 이후 그는 미 하원 프레이저 청문회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비난하며 각종 치부를 폭로했다. 정권의 비리가 담긴 회고록도 썼다. 그러다 실종되자 온갖 추측이 난무한 것이다. 파리 근교서 살해한 후 양계장 분쇄기로 처리했다는 설도 있었고 영화 '증발'에서처럼 서울로 납치돼 청와대 지하에서 죽음을 맞았다는 주장도 떠돌았다.

이 사건의 윤곽은 영화 증발이 만들어지고 나서 10년도 더 지난 2005년 드러났다.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이하 진실위)는 김형욱 실종사건에 대한 중간 조사결과를 발표하며 김재규 당시 중정부장의 지시로 프랑스에 있던 요원들과 이들이 고용한 제3국인에 의해 김형욱이 납치, 살해됐으며 파리 근교에 유기된 것으로 조사됐다고 했다.

김재규가 살해를 지시했으며 이에 따라 프랑스에 있던 중정 연수생 두 명이 동구권의 살인청부업자 두 명과 함께 1979년 10월 7일 김형욱을 납치해 파리 근교로 데려가 권총으로 살해했다는 것이다. 김형욱을 직접 살해한 제3국인 두 명은 미화 10만 달러를 받은 것으로 파악됐다. 하지만 살해를 지시했다는 김재규는 김형욱이 실종된 뒤 채 한 달도 안 돼 대통령을 살해하고 이듬해 사형이 집행됐다. 진실위의 발표에도 불구하고 그의 실종사건 실체가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는 평가도 적지 않다.

김철현 기자 kch@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