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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 詩]각본도 연출도 없이/박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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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니저도 소속사도 없이 밥 먹는 연기를 한다 출근하는 연기를 하고 출근해서도 연기를 한다 일하는 연기 하루 종일 연기하다 퇴근하는 연기 친구들과 술 마시는 연기도 하고 취하는 연기 취해서 소리 지르고 노래 부르는 연기 연기를 하다가 나도 모르게 눈가에 살짝 이슬이 맺히기도 한다 이십여 년 전에 결혼하는 연기를 한 적이 있는데 연기가 너무 서툴렀다 각본도 있었고 몇 명이 함께 연출을 했는데 제대로 된 연기를 하려니까 너무 긴장이 되었던 것 같다 내내 아쉽다 사람들이 내 연기를 꼼꼼하게 모니터링을 하기도 한다 내가 오른손으로 밥을 먹는지 왼손으로 먹는지 내가 어떤 여자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지 대사를 점검해 주기도 한다 내가 그 사람은 나하고 생각이 틀려라고 말하면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라고 정정해 준다 나는 곧 쏘뤼 다른 것이라고 다시 말한다 얼룩말 연기를 하는 친구들도 있다 초원에 흩어져 풀을 뜯다가 사자가 다가오면 혼신의 힘을 다해 도망가는 연기다 목숨을 건 연기라고나 할까 모기 연기를 하다가 모기약을 정통으로 맞고 죽은 친구 쥐 연기를 하느라 시궁창에서 찍찍거리고 있는 친구 닭 연기를 하느라 최대한 닭처럼 보이려는 친구 전체적인 흐름도 모르고 리허설도 없이 그때그때 애드립으로

■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하거나 거짓된 행위를 할 때 사람들은 흔히 ‘연기하지 마라’라고 한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 애초부터 정체성이라는 게 따로 있었나 싶다. 태어나 보니 사람이고 그것도 한국 사람이고 남성이거나 여성이지 않았던가. 그리고 어쩌다 어른이 되어 버렸고. 실존철학에서는 이를 두고 ‘소여(所與)’라고 말한다. 어려울 것 없다. 이미 그렇게 주어진 바라는 뜻이다. 어쩌면 사람살이란 그렇게 주어진 바를 착실하게 이루어 나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매니저도 소속사도 없이” “전체적인 흐름도 모르고 리허설도 없이 그때그때 애드립으로” 말이다. 그러니까 우왕좌왕하는 거다. 그러니까 실수하는 거다. 그러니까 힘들고 어려운 거다. 그런데 그래서 달리 생각해 보면 흥미진진한 거다. ‘내 것 아닌 내 것 같은’ 나를 ‘진짜’ 나로 만들어 가는 것, 그게 필생의 업이 아닐까.




채상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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