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지금 /문 밖에서 울고 있는가. /인적 뜸한 산 언덕 외로운 묘비처럼 /누가 지금 /쓸쓸히 돌아서서 울고 있는가.
그대 꿈은 /처음 만난 남자와 /오누이처럼 늙어 한 세상 동행하는 것 /작고 소박한 꿈이었는데 /왜 그렇게 힘들었을까.
세상의 길들은 끝이 없어 /한번 엇갈리면 다시 만날 수 없는 것 /메마른 바위를 스쳐간 /그대 고운 바람결 /그대 울며 어디를 가고 있는가.
내 빈 가슴에 한 등 타오르는 추억만 걸어놓고 /슬픈 날들과 기쁜 때를 지나서 /어느 먼 산마을 보랏빛 저녁 /외롭고 황홀한 불빛으로 켜지는가.


-장석주의 '애인'

의정부서 장흥으로 가는 39번 국도를 지나다 보면 일영 부근 어디, 마치 덧없이 스치는 기억과도 같은 팻말 하나가 있다. 온릉(溫陵). 단경왕후 신씨가 잠든 곳이다. 반정 이후 중종이 되는 진성대군의 아내였던 그녀는, 남편이 왕이 된 지 7일 만에 중궁(中宮)의 자리에서 폐위된다. 그녀 나이 스무 살, 1506년 9월의 일이다. 단경왕후는 반정 때 처형된 신수근의 딸이다. 중종반정은 장인을 죽이고 아내를 폐위시킨 혼란스러운 왕실사를 담고 있기도 하다. 신수근은 그의 여동생이 왕비가 된, 연산의 척신이었다. 쿠데타 쪽의 입장으로 보자면 제거 1순위인 셈이다. 벌떼처럼 쿠데타 세력들이 궁으로 밀려들어 오는, 영화 '왕의 남자'의 마지막 장면은, 단경왕후의 비극적 운명을 숨기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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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정공신들은 단경왕후가 왕후가 되면 아버지 신수근의 원수를 갚으려고 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그녀의 폐위를 건의한다. 중종은 사랑하는 아내를 버릴 수 없어 괴로워하지만 중신들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왕은 아내를 쫓아낸 뒤 그녀가 보고 싶어 경복궁 경회루를 자주 서성거린다. 신씨의 본가는 인왕산 근처에 있었다. 왕이 자신을 못 잊어 한다는 소문을 들은 그녀는, 궁궐서 잘 보임직한 인왕산 자락의 너럭바위 위에 분홍치마를 펼쳐놓았다. 그 치마는 부부가 단란하던 시절에 그녀가 즐겨 입었던 것이었다. 왕은 그 붉은 그리움을 보았을까. 그러나 신씨가 일흔한 살로 눈감기까지 남편을 다시 볼 기회는 없었다. 인왕산의 무심한 가을바람에 서럽게 펄럭이던 연분홍 마음만 바위처럼 굳어져 '치마바위'라는 이름으로 주저앉았다.

세상의 길들은 끝이 없어/ 한번 엇갈리면 다시 만날 수 없는 것/메마른 바위를 스쳐간/그대 고운 바람결/그대 울며 어디를 가고 있는가. 장석주의 시 '애인'은 온릉의 '삐뚜루 선' 장명등(長明燈)(정지용의 '카페 프란스'의 구절)처럼 외롭고 황홀했을 어느 시간을 가만히 비춘다. 처음 만난 남자와/오누이처럼 늙어 한 세상 동행하는 것/작고 소박한 꿈이 무너지던 소리가, 문득 500년 지나 충무로 길섶, 한 남자의 가슴에서 아프게 진동한다.


빈섬 이상국 (편집부장·시인)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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