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군의 살아있는 역사. 제 손끝을 거쳐갔죠”
[아시아경제 양낙규 기자]해군에서 가장 많은 역사적인 기록을 사진에 남긴 부사관을 손꼽으라면 바로 이 사람밖에 없다고 입을 모은다. 바로 해군3함대 정훈공보실 소속 김용헌 상사다.
김 상사는 뼈속까지 해군이다. 1976년에 강원도 삼척에서 태어난 김 상사는 아버지도 해군 부사관이었다. 아버지는 1993년 지병으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아들들이 모두 해군이었으면 하는 말을 남기셨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해군을 먼저 선택한 사람은 형 김 헌 중령이다. 김헌 중령은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해 해병대를 선택했다. 지금은 해병대 1사단에서 근무중이다.
김 상사도 형을 따라 해군사관학교를 지원했다. 하지만 두번이나 낙방이라는 고배를 마셔야 했다. 김 상사는 포기할 수 없어 해군 부사관 지원서를 제출했다. 1996년에 입대한 김 상사는 어릴적부터 글쓰기와 사진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망설임 없이 정훈병과를 선택했다. 김 상사는 당시 '배우는 재미'라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
김 상사는 그해 6월 강원도 동해에 위치한 1함대에 첫 배치를 받았다. 막내 하사였던 김 상사가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그저 정훈선배들의 꽁무니만 쫓아 다녔다. 선배들의 내공은 현장에서 돋보였다. 바로 김상사가 동해 1함대에 온지 3개월만인 1996년 9월에 발생한 북한 무장간첩 잠수함 침투사건때였다. 햇병아리 정훈부사관인 김 상사에게는 너무나 버거운 사건이었지만 사진기를 들고 몸을 던지는 선배들의 모습을 보며 사진은 손으로 찍는 것이 아니라 발로 찍는 것이구나라고 느꼈다.
김 상사에게도 기회는 왔다. 바로 2년뒤인 1998년 6월에 벌어진 강원도 속초 해상에서의 북한 잠수정사건때다. 당시 김상사는 사진뿐만 아니라 영상까지 모두 소화해야만 했다. 한 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기록물에 남기느냐에 따라 역사의 평가가 달라질 수 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해군 정비창을 거쳐 경남 진해에 있는 해군사관학교에 배치를 받았다. 부임 첫날 김상사는 캠퍼스를 거니는 해사생도들을 보게 되면 부러움만 생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도들을 마주치는 순간 오히려 내 자신에게 당당함을 느꼈다. 생도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뿌듯한 순간이었다.
2010년초에 결혼한 김 상사는 그해 가을, 또 다른 지원서를 손에 쥐었다. 바로 해외파병 지원서다. 신혼이었던 김상사는 부인에게 파병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건넸다. 걱정했던 김상사의 마음은 부인의 한마디에녹아내렸다. 당시 부인은 "군인은 나라의 사람이고 나라가 부르면 가는 것이 맞다"라고 대답했다. 김상사는 그때 부인의 대답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청해부대에 소속된 김상사는 최영함에 올라타 파병길에 오르지만 또 한번의 큰 작전을 겪는다. 바로 2011년 1월 여명작전이다. 최영함이 홍해 지프티항에 입항하려했지만 지휘부로부터 우리나라 선박이 피랍됐다는 소식을 듣게된다. 긴장감이 몰려왔다. 작전을 사진과 영상에 담을 사람이 자신밖에 없다라는 생각에 부담감도 들었다. 해군 특수전여단(UDT/SEAL)을 제외한 모든 인원의 출입이 통제될 만큼 위험도 감수해야만 했다. 등줄기에 쉴새없이 흘러내리는 땀은 5시간의 교전이 끝난다음에야 멈췄다. 김상사는 작전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오는 장병들을 보는 순간,역사의 기록을 남겼다는 보람과 작전성공에 대한 성취감을 밀려왔다.
귀국한 김 상사는 가족들과 함께 현충원을 가장 먼저 찾았다. 아버지에게 자랑스러운 아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김상사는 "현충원에 아버지를 만나러 갈때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나란히 누워있는 전우들을 보게 됩니다"라며 "전우를 보며 가족들에게 말하죠. 군인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것은 군인으로서 최대의 영광이라고요"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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