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임온유 기자] 2014년 한국 뮤지컬계는 심하게 앓았다. 4.16 세월호 참사 이후 이어진 국가적 추모행렬은 공연 수요가 고꾸라지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자금이 돌지 않자 공연의 과잉 공급, 시장 규모에 비해 높게 책정된 개런티 등 구조적 병폐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쓰릴 미'를 제작한 중견 제작사 뮤지컬해븐은 지난해 8월 재정난으로 법정관리를 신청해야 했다. 비오엠코리아의 '두 도시 이야기'는 배우스텝 임금 체불 문제로 공연 직전 취소되기도 했다. 지난 한 해 취소되거나 보류된 작품만 10여 편이 넘는다.


그러나 2015년 뮤지컬계는 반전을 도모한다. 작품성과 대중성 모두 갖춘 창작 뮤지컬을 지속적으로 성장시킴으로써 구조적 문제를 타파하겠다는 계획이다. 공연계 비수기라 여겨지는 3월이지만 벌써부터 가능성을 보이는 작품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지난 3월12일 막을 올린 창작 뮤지컬 '로기수'와 2월27일 시작한 '난쟁이들'이 그 예다. 약진하는 두 창작뮤지컬은 시대적 상황, 분위기를 포함해 무대구성 등에서도 전혀 다른 색깔로 관객들을 유혹한다.

전쟁 중에도 꿈을 찾는 뮤지컬 ‘로기수’

뮤지컬 '로기수'

뮤지컬 '로기수'

AD
원본보기 아이콘

"거제도 수용소 76막사! 인민군 포로 로기수요! 내래 이 춤 때문에 사상도 버리고 고향도 버렸소!" 1952년 거제도 포로수용소. 북한군 소년 '로기수'는 미국 흑인 장교가 추는 탭댄스에 마음을 빼앗긴다. 전쟁터에서 춤이라니. 아이러니하다. 형 '로기진'은 미제 춤에 빠져버린 동생을 설득하지만 로기수는 탭댄스가 남긴 강렬한 인상을 좀처럼 지우지 못한다. 그 와중에 수용소장 '돗드'는 미국의 우월함을 과시하려 미제 춤에 빠져버린 이 소년 포로를 공개 무대에 세우려 한다. 이념과 꿈 사이에서 괴로워하지만 로기수는 도저히 춤을 놓을 수 없다.


로기수는 이렇듯 북한군 소년 포로의 꿈과 희망을 다룬 뮤지컬이다. 프레스콜 이후 진행된 인터뷰 당시 무엇보다 돋보였던 것은 공연에 대한 제작진 및 배우들의 자부심이었다. 로기진‘ 역을 맡은 배우 홍우진(35)은 "우리 공연을 보시고 해외 라이센스 뮤지컬 못지않은 창작 뮤지컬이 있구나' 느끼시길 바란다. 유명한 연예인 때문이 아니라 좋은 작품이라는 입소문을 듣고 관객들이 찾아와주셨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로기수는 기존 창작 뮤지컬에 비해 높은 완성도를 보였다. 우선 대본이 탄탄했다. 6.25 전쟁 중 거제포로수용소라는 복잡한 상황이 배경임에도 극적 서사가 무리 없이 흘러갔다. 주인공이 꿈을 이루기 위해 겪은 내면 갈등이 주고받는 대사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묻어났다.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효과적으로 드러날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공들인 무대장치다. 2층으로 된 무대 구조는 포로가 느꼈을 법한 숨 막히는 고립감을 전하는 데 일조했고 800여 번에 달하는 조명 전환은 관객이 삭막함 속에서도 춤추고자 하는 소년의 감정변화를 읽어낼 수 있도록 도왔다. 각 장면의 분위기를 잘 녹여낸 음악 역시 극에 대한 관객의 몰입도와 이해도를 높였다.


물론 아쉬움이 남는 부분도 있다. 쉼 없이 이어지는 노래와 안무 탓에 주인공 김대현(로기수 역)의 음정은 공연 내내 심하게 불안정했다. 지나치게 속도감 있는 전개는 관객들이 쫓아가기 벅찰 때도 있다. 극 초반 반동이 일어난 급박한 상황 속에서 '해방동맹' '대한반공청년단' 등의 용어를 빠르게 설명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역사적 배경을 좀 더 쉽고 친절하게 전달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한다면 로기수는 더 멀리 날아 창작뮤지컬의 한계를 깨뜨릴 수 있는 작품임에 틀림없다. 5월31일까지 DCF대명문화공장.


“사랑에 목숨 거는 건 있는 애들이나 하는거야” 뮤지컬 <난쟁이들>

뮤지컬 '난쟁이들'

뮤지컬 '난쟁이들'

원본보기 아이콘

신데렐라, 백설공주, 인어공주가 사는 동화나라에 무도회가 열린다는 공고가 났다. 무도회에서 사랑에 빠져 키스를 하는 커플이 새로운 동화의 주인공이 된단다. 가난한 일상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난쟁이 찰리는 무도회를 인생 역전의 기회로 삼으려 한다. 공주를 유혹해 신분상승 하려는 찰리는 할아버지 난쟁이 빅과 함께 신데렐라를 공주로 만들어준 마녀에게 간다. "9등신으로 바꿔주세요." 개천에서 용 나던 시절은 지났다고 거절하는 마녀를 숨겨왔던 보석을 주고 설득해 빅과 찰리는 결국 무도회장에 입성한다.

AD

'난쟁이들'은 '어른이 뮤지컬'이라 불린다. 19금 대사가 주요 요소인 탓도 있지만 세상이 얼마나 '끼리끼리' 사는 곳인지 깨달은 어른만이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공주, 왕자들도 영악해져서 아무리 예쁘고 잘생겨도 평민이면 안 만나." 극 초반 난쟁이들은 동화와 다른 현실을 신나게 비틀어댄다. "사랑에 목숨 거는 건 있는 애들이나 하는 거야." "절대 가장은 되지 말거라." 연말정산이 폭탄이 된 최신 이슈도 끌어와 관객들에게 통쾌함을 선사한다. 로기수가 창작 뮤지컬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작품이라면 난쟁이들은 창작 뮤지컬만이 가진 장점을 십분 활용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난쟁이들은 중소규모 창작뮤지컬이 가진 장점을 극대화했다. 객석에서 등장한다거나 관객과 눈을 맞추며 이야기하는 연출은 배우와 관객 사이를 좁히고 두 주체가 소통하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극적 서사가 미흡한 부분은 보완해야 할 점이다. 이야기보다는 신데렐라 백설공주 인어공주 캐릭터가 강조되어 각 장면이 분절적으로 연결된다. 극의 마무리에 가서 '진정한 사랑에는 조건보다 마음이 중요해'라는 급한 결론을 내려 애쓰지만 역부족이다. 위트 있는 대사 덕에 관객들이 웃음을 터뜨리는 지점의 간격은 짧았지만 공연이 끝나면 왜 웃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을 정도로 스토리텔링이 약했다. 현실감각으로 똘똘 뭉친 뮤지컬 '난쟁이들'. 풍자와 해학이 전체 이야기에 자연스레 녹아든다면 대중성 있는 창작 뮤지컬로 안정적이게 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4월26일까지 충무아트홀.


임온유 기자 ioy@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함께 보면 좋은 기사

새로보기

내 안의 인사이트 깨우기

취향저격 맞춤뉴스

많이 본 뉴스

당신을 위한 추천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