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페이'는 우리 사회 미래를 좀 먹는 일"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패션위크' 행사장 바깥의 '열정페이' 반대 집회 현장
[아시아경제 정현진 기자] 지난 21일 오후 황사가 자욱한 서울 동대문디자인프라자(DDP)에선 화려한 패션 행사가 열렸다. 무대에선 긴 다리에 멋진 의상을 입은 패션 모델들이 런웨이에서 강력한 카리스마를 뽐냈다.
같은 시각, DDP바깥에선 패션노조·알바노조·청년유니온 등 13개 단체가 모여 '열정페이' 철폐를 외쳤다. 참석자들은 화려한 패션쇼의 이면에서 디자이너, 사진가 등의 이름으로 일하면서 사실상 행사 전반을 책임지지만, '수습', '인턴', '실습' 등의 명목으로 한 달 10만~20만원 가량의 초저임금에 시달려 온 패션 노동자들 및 비슷한 처지의 다른 직종 청년 노동자 등이었다. 이들은 집회에서 "더 이상 청년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이처럼 헐값에 착취하기만 하면 우리 사회의 미래가 보이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이 하필 국내 대표적 패션쇼인 '패션위크'가 열리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기자회견을 연 이유는 패션쇼에 온 청년들이 우리 사회의 열정페이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해결해 나갔으면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특히 참석자들은 이 자리에서 "더 이상 열정페이는 없다"고 선언했다.
이날 집회는 최근 심각한 청년 실업 사태 속에서 수습, 인턴 등의 명목으로 청년 노동자들을 싼 값에 '착취'하는 '열정페이' 문제가 사회 이슈로 등장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 자리였다. 현재 우리 사회는 그동안 사실상 '관행'으로 치부돼 왔던 패션업계 등 도제식 업무 교육이 이뤄지는 곳을 비롯해 사회 전반에서 청년 노동자들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취급하며 싼 값에 고용·해고를 반복하는 행태에 대해 이른바 '오포 세대'(결혼,취업,연예,집,친구)를 탄생시켜 높은 자살률·저출산 등 심각한 사회 문제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배트맨 D'라는 별명을 가진 패션노조 대표는 공동성명서를 통해 "월 10만원에 수습 직원의 땀과 노력을 착취한 패션업계의 열정페이는 시작에 불과했다"며 "열정이 있으니, 좋아하는 일이니 참고 견뎌야 한다는 미개한 임금 계산법은 패션업계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어 "젊음은 돈 주고 살 수 없어도, 젊은이는 헐값에 살 수 있다고 믿는 이 사회의 폭력에 맞설 것"이라 강하게 외쳤다.
이 자리에선 패션계뿐만 아니라 청년 노동 전반의 '열정페이' 문제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집회에서 정병욱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소속 변호사는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청년실신(실업자+신용불량자)' 문제를 언급하며 "우리 사회는 청년을 고작 착취대상으로만 보고 있다"며 "하다못해 돈 주고 팔려고 하는 인간 이하의 대상으로 보고 있는 듯 하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청년 노동의 '열정페이'문제는 이미 연구를 통해 수치적으로 문제가 드러났다. 지난 18일 청년유니온이 발표한 '청년과도기 노동의 실태와 대안'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공공 기관ㆍ민간기업에서 근무하는 인턴ㆍ수습ㆍ실습 근로자들의 월 평균 급여는 무급근로자를 포함해 66만7000원으로, 최저임금에 20만원 정도 모자라는 금액으로 나타났다.
이날 발언대에 선 김민수 청년유니온 위원장은 "참고 견디라고 하는 희망 고문을 받는 청년들은 어떻게 살 수 있는가"라며 "청년들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정부가 제대로 보여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집회를 지켜본 구직자, 학생 등 젊은 층들은 패션계 등에서 아직도 관행처럼 여겨지는 열정페이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시했다.
연세대에 재학 중인 한윤지씨는 "패션계가 노동 수요보다 공급이 많다고 여겨지는 분야이다 보니 노동착취가 일어나는 것 같다"며 "20대 노동권을 보장할 수 있는 인프라가 구축되어야 할 것 같다" 고 말했다. 그는 이어 "사실 일을 하는 입장이 되면 노동 착취를 당해도 말을 하는 게 어렵다"며 "빨리 제도화 돼서 노동착취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요구해도 불이익을 겪지 않는 환경이 마련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취업준비생 김주한(26)씨와 이민후(24)씨도 청년의 노동착취에 대한 우려에 공감을 표했다. 이씨는 "지금 인턴 채용에 지원서를 내고 있는데 돈도 못 받고 정규직 전환도 안 될까봐 무섭다"며 "차라리 공무원 준비를 해볼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라고 말했다.
김씨도 "인턴도 곧 스펙"이라서 취직이 너무 어려우니 스펙 한 줄을 채워넣기 위해 적은 돈을 받더라도 인턴을 할 수밖에 없다"고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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