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지가 된 신문지'…뒤늦게 조명된 작가 '최병소'
[아시아경제 오진희 기자]너덜너덜한 먹지처럼 돼버린 신문지. 검정색 볼펜으로 색칠하며 텍스트를 지워가는 반복행위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작게는 신문 한 면 사이즈부터 크게는 7m, 15m짜리 바닥까지 늘어뜨린 것도 있다. 액자도 끼우지 않고, 어떤 보호막도 없이 그대로 전시된 작품이다. 관람객이 모르고 밟을 수도, 무심코 만져서 찢어질 수도 있는데 작가는 "아무렇지 않다"고 한다. 부스러질듯한 작품에도 서명은 있다. 볼펜으로 색칠하지 않은 작은 동그라미 부분에 '최병소'란 이름이 적혀 있다.
최근 미술계는 최병소 작가(72)에 주목하고 있다. 그의 작품에 나타난 단색조의 화면과 독특한 작품 방식을 두고 한국의 '단색화' 또는 '실험미술'의 계보에 최 작가를 포함시키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오랜 기간 전시 등 외부 활동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그였기에 이제야 작가의 작업세계가 조금씩 재조명되고 있는 것이다. 지난주 그의 개인전이 열리면서 전시를 소개하는 간담회장을 찾았다. 미술계야 어떻게 이야기하든 작가는 그저 담담한 표정이었다. 또한 질문을 받으면 조금은 어눌한 목소리로 솔직하게 답변할 뿐이었다.
작가는 대학을 졸업하고 국내 최초 현대미술제인 '대구현대미술제'에서 고 박현기, 이강소와 창립멤버로 대구지역 전위예술단체 일원으로 활동했지만 1980년대부터 1990년대 대부분을 두문불출하듯 지냈다. 그는 자신의 대학시절에 대해 "사실 공부 체질도 아니어서 대학 갈 생각도 없었다. 그저 구경삼아 대학엘 들어갔고 그때 입학도 쉬웠다. 문학이나 영화, 미술 강의를 들었는데 미술에는 영 흥미가 나지 않았다"며 "대구의 어느 화랑에서 전위 예술가 김구림씨의 작품을 봤는데, 마른 걸레로 바닥을 닦아 놓은 게 작품이더라. 충격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그림을 잘 그린다고 작가가 아니었다. 그땐 '방법론'이 있어야 했다. 나도 내 방법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고 했다.
그런 생각을 할 즈음, 작가에게 신문지를 지우는 행위가 처음 다가왔다. 그 과정에는 재미있는 일화도 있다. "버스를 타고 가고 있는데 멀리 노점에서 물건을 팔고 계시는 할머니가 있었다. 우리 친할머니와 똑같이 생긴 분이었다. 당장 버스에서 내려 할머니 있는 데로 달려갔는데, 낡은 LP판과 음악 테이프를 팔고 계시더라. 그걸 사서 집으로 가 카세트로 틀어봤더니 불경이 나왔다. 들으면서 우연히 신문지 위에 낙서하듯 볼펜으로 글씨를 지워갔는데 그게 신문지 작업의 계기가 됐다." 전시장 안 한쪽 모퉁이엔 작가가 사용했던 카세트가 신문지 위에 올려져 있다.
1975년 시작된 신문지 지우는 행위는 군부 독재시절 엄격한 언론탄압과 신문검열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 표현됐다. 그러나 30대 초반의 젊은 그에게 이 작업은 지속되기 어려웠다. 다양한 실험적인 작품들을 선보인 후 공백기를 가진 그는 1990년대 중반에야 대구의 한 화랑에서 전시의뢰가 들어오면서 신문지 작업을 다시 하게 된다. 신문을 지우는 행위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묻는 질문에 작가는 "부질없는 행위가 맞다. 그게 나와 같다. 나를 비우는 행위다"라며 "이제는 그 지루함을 몸으로 견뎌내는 것이 나의 작업이다. 나는 몸으로 그린다. 눈이나 머리, 가슴보다 몸으로 그리는 것이 적성에 맞다"고 말했다.
작가는 대구 출신으로 현재도 대구 수성못 인근 작업실에서 매일같이 신문지나 종이, 연필, 볼펜과 같은 재료들을 사용해 작품을 만들고 있다. 하루에 볼펜 열 자루 이상이 소비된다고 한다. 단순한 재료와 단순한 행위에서 뿜어져 나오는 작가의 예술철학은 치열하다기 보단, 마치 선인이나 기인과 같은 모습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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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를 기획한 갤러리 관계자는 "최 작가의 작품이 지난해 열린 아트페어 아트바젤홍콩에서 미국 유명 콜렉터에게 처음 팔렸다. 그만큼 외부로 유통된 경우가 거의 없다"며 "이번 전시가 그동안 미진하게 연구됐던 '최병소' 작가를 만나볼 수 있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4월26일까지. 서울 소격동 아라리오갤러리. (02)541-5701.
오진희 기자 valer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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