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첫 비디오 아티스트 '박현기' 회고전
1979년 10월 3일부터 12월 9일까지 열린 '제15회 상파울로비엔날레'에 출품된 '물 기울기 퍼포먼스'의 기록사진. 작가가 기울인 모니터의 기울기만큼 화면의 물도 비스듬하게 기울어져 있다.
[아시아경제 오진희 기자] 국내 첫 비디오 아티스트 고(故) 박현기(1942~2000년)의 회고전이 열리고 있다. '만다라'로 이름붙인 이번 전시는 박현기 작가의 예술인생을 조명하며, 수많은 작품과 아카이브를 소개하고 있다.
박현기는 국내에서 비디오를 본격적으로 예술에 도입했던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로 꼽힌다.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이 주로 외국에서 활동하면서 1984년에야 한국을 드나들기 시작한 데 반해, 박현기는 이미 1970년대 말부터 영상 매체를 작품에 활용하며 독특한 비디오 작업을 해나갔다. 58세의 길지 않은 생애 동안 수많은 작품과 자료를 남긴 그의 사후 여러 차례 작가를 재조명하기 위한 시도가 있었으나, 이번에 열리는 그의 회고전은 2만 여 점에 달하는 그의 자료가 처음으로 정리 완료돼 공개되는 전시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1965년 학창시절 메모부터 2000년 임종 직전의 스케치까지 35년간 그의 인생과 예술을 들여다볼 수 있는 풍부한 자료가 선별됐다. 또한 각종 자료를 토대로 그의 주요 작품을 재현(再現)해 냄으로써, 박현기의 ‘거의 모든 것’을 전시에 담아냈다.
그의 작품이 특별한 이유는 그가 ‘비디오’라는 당시로서는 새로운 매체를 활용하면서도, 그것을 매우 동양적인 정신의 바탕 위에 올려놓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초기 비디오 작업은 돌탑 사이에 돌을 찍은 영상 모니터를 끼워 넣은 것들이다. ‘그냥 돌’과 ‘모니터의 돌’은 서로 중첩되어, 무엇이 실재이고 무엇이 허상인지의 구별 자체를 모호하게 만든다. 마치 하늘에 뜬 달과 강물에 비친 달을 구별하지 못한 채, 강물의 달을 잡으려다 익사했다는 전설을 남긴 이백(李白, 701~762년)의 정신세계와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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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작품은 동양적인 것과 서양적인 것, 정적인 것과 동적인 것, 성스러운 것과 세속적인 것 등 세상의 온갖 극단(極端)들이 서로 갈등하고 공존하는 일종의 ‘에너지 장(場)’을 형성한다. 이번 전시의 기획자는 "미디어의 끊임없는 변모 속에서도 어쩌면 항구적일지 모를 인류 궁극의 가치를 찾아내는 일에 주력했다고 말할 수 있다"며 "작가에겐 ‘미디어’는 영구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을 ‘우주적 코드’를 암시하는 도구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2000년 3월 29일부터 6월 7일까지 '제3회 광주비엔날레'에 출품된 박현기의 유작이다. 지문 위에 각자의 주민등록번호가 생겼다 사라지는 영상이 끊임없이 계속된다. 이렇게 수많은 인간들이 각자의 '코드'를 지닌 채 태어나고 죽는다는 의미를 지닌다.
원본보기 아이콘박현기는 1942년 식민지 시대 일본 오사카의 가난한 한국인 가정에서 태어나, 1945년 해방이 되자 대구에 정착했다. 홍익대학교에서 서양화와 건축을 함께공부한 후 1970년대 초 대구로 낙향, 건축 인테리어 사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번 돈을 모니터와 카메라를 사서 작품 활동을 하는 데 쏟아 부었다. 1974년부터 시작된 대구현대미술제의 주요 작가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1979년 상파울로 비엔날레, 1980년 파리 비엔날레에 출품하면서 일찍부터 국제적인 시야를 넓혔다. 1980년대에는 일본에서 여러 차례 전시회를 가진 바 있다. 1990년대 한국에서도 비디오 아트에 대한 열풍이 일어나면서 박현기의 활동이 주목 받게 되었으며, 그는 1997년 이후 '만다라'시리즈, '현현'(顯現) 시리즈 등 대표작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국내 비디오아트의 선구자로 각광받으며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기, 갑작스럽게 위암 말기 판정을 받고 2000년 1월 별세했다. 5월 25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02-2188-6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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