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70년]80년대 '3低' 타고 슈퍼체력 키운 맹렬 기업가들
50년대 겨우 10% 차지했던 제조업
70년대 중화학공업 투자정책으로 부흥
합리화정책·IMF 등으로 구조조정
90년 이후엔 '고용없는 성장' 시달리기도
성장잠재력 저하, 다시 제조업 재조명
[아시아경제 최대열 기자]식민지배에서 해방됐다고해서 곧 경제가 발전하는 건 아니다. 당장 한반도의 20세기 중반 이후부터만 보더라도 이는 명확해진다. 해방 직후 이념갈등과 분단, 전쟁 등 우리나라는 적잖은 굴곡을 겪었고 결국 남과 북은 서로 다른 체제를 영위하게 됐다. 학자마다 견해는 다르지만 분단 당시 북한의 국내총생산(GDP)은 남한보다 우위에 있었다는 게 정설이다.
해방 후 70년이 지난 오늘날, 남과 북의 경제격차는 비교가 무색할 만큼 격차가 벌어졌다. 영국의 경제학자 앵거스 매디슨에 따르면 1953년과 2008년 사이 1인당 GDP 증가율을 따졌을 때 남한은 1730%로 전 세계 모든 국가 가운데 세번째로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산유국이나 다이아몬드 생산국가를 포함한 순위에서도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輕工業에서 重化學工業으로…해방 후 숨가쁘게 달려온 한국경제
한국 경제의 발전과정은 산업의 발전과 궤를 같이 한다. 해방 직후부터 1950년대 말까지만 해도 농림어업, 1차 산업이 전체 국가경제의 40% 전후를 차지했다. 당시만 해도 제조업은 10%를 겨우 넘는 수준이었으며 수출에서도 제조업 비중은 4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 막 태동하기 시작했던 제조업 역시 외국 원조자금에 의존한 일부 소비재 위주의 경공업에 집중됐다.
1960년대로 넘어오면서 제조업이 국가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커졌다. 1970년대 이르러서는 전체 수출의 90% 가까운 비중을 차지하게 됐다. 정부의 주도 아래 수출확대에 전력을 다한 결과였다. 국가기록원에 따르면 정부는 1962년 수출진흥위원회를 설치하고 각종 정책을 입안해 섬유제품을 비롯한 합판, 가발, 신발 등을 주요 수출품목으로 끌어올렸다. 1964년 11월 당시 수출 1억달러 달성을 기념해 수출의 날이 제정됐고 현재까지 무역의 날로 이어지고 있다.
김도훈 산업연구원 원장은 "당시 개발도상국과는 다르게 한국의 제조업이 획기적으로 발전한 건 일찍 국제무역에 눈을 뜬 초기 무역상의 기업가 정신이 발휘된 데다 농업이 흡수하지 못한 인력이 거의 무한대로 제조업에 공급됐기 때문"이라며 "아울러 수출형 노동집약적 제조업을 발전시키는 데 정부가 총력을 기울였다"고 설명했다.
1973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연두 기자회견을 열고 중화학공업시대를 선언했다. 이전까지 노동집약적 수출산업으로 막 일어선 한국경제를 한 차원 끌어올리기 위해서였다. 일자리가 늘고 공장은 바쁘게 돌아갔지만 노동집약적 수출산업 위주의 성장은 한계를 드러냈다. 원부자재를 수입해야하는 탓에 해외 의존도가 심화되고 이로 인해 만성적인 무역적자에 시달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전 국민의 과학화', '1980년대 초까지 제철능력 1000만t, 조선능력 500만t, 전력 1000만㎾', '제2 종합제철공장' 등 구체적인 목표를 제시했다. 당시 정부 주도의 정책추진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이 있으나 오늘날 한국경제와 주력산업의 큰 틀이 당시 형성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는 점은 대부분 수긍한다.
◆산업합리화ㆍ구조조정ㆍ시장개방…치유의 80~90년대
앞만 보고 달려온 국내 산업계는 1980년대로 넘어오면서 잠시 뒤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됐다. 60~70년대 특정산업 위주의 육성정책이 가져온 부작용이 하나둘 드러났기 때문이다. 정부가 1979년 발표한 경영안정화 시책, 이듬해까지 이어진 중화학공업 투자조정시책의 일환으로 진행된 전체 산업에 대한 일종의 구조조정인 셈이다.
당시 합리화 정책이라는 명목 아래 비료공업을 비롯해 해운ㆍ자동차ㆍ발전설비ㆍ석탄산업ㆍ조선산업 등 산업 전분야에 걸쳐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단행됐다. 짧은 시간 안에 이뤄진 급격한 변화 탓에 국가경제의 주축으로 부상한 중화학공업의 생산활동이 전반적으로 위축됐으나, 80년대 중반 이른바 3저현상(저유가ㆍ저달러ㆍ저금리)으로 인해 국내 산업계는 뜻하지 않게 호황기를 맞이했다.
80년대 산업계 구조조정은 집약적인 성장에 따른 후유증을 극복하고 경쟁력을 끌어올리기 위한 방편이었으나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김 원장은 "중화학공업 투자조정은 흡수합병에 따른 기업의 대형화를 촉진해 재벌의 경제력 집중을 가속화했고 특정기업에 독점적 지위를 줘 독과점적 시장구조를 심화시켰다"고 평가했다.
1980년대 후반 들어서는 정부 개입이 줄고 민간자율체제로 산업정책 기조가 바뀌었으며 외국자본의 국내 투자유치에 대해서도 본격적인 바람이 불었다. 90년대로 넘어오면서는 우루과이라운드 협상타결과 뒤이어 세계무역기구(WTO) 출범에 따라 시장개방압력이 거세졌다. 국내외 생산거점ㆍ시장의 구분이 사라지면서 기존까지 해외 시장을 적극 공략하던 자동차ㆍ철강ㆍ전자 등 주력산업분야에서 세계 수위권으로 올라서는 발판을 마련했다.
그러나 농업ㆍ수산업 등 1차산업에 대한 소외현상이 심화되는 한편, 내수 기반의 산업과 해외지향형 산업간의 연관관계도 희미해졌다. 과거 수출이 늘면 국내 산업 경기가 함께 좋아지는 경향이 강했으나 90년대 이후부터는 수출이 호조를 보이더라도 국내 경제가 크게 나아지지 않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선진국이 80년대부터 겪던 '고용 없는 성장'의 한 단면이다.
정보통신(IT)업종을 중심으로 기술개발에 매진하게 된 것도 이때다. 선진국의 견제가 심해지고 중국ㆍ아세안 등 후발 공업국이 뒤쫓아오면서 국내 산업계가 '샌드위치' 신세로 전락하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된 데 따른 현상이었다. 국민총생산 대비 연구개발(R&D) 비중이 1990년 1.7%에서 1997년 2.5% 수준으로 늘어나는 등 기술개발에 대한 투자가 늘어났고, 특히 전체 연구개발 지출 가운데 민간 담당비중이 70~80%까지 늘어나 과거 정부나 공공기관이 주도하던 시대와는 달라진 점을 여실히 보여줬다.
90년대 말 불어닥친 외환위기는 국내 산업계에 다시 한번 거대한 구조조정을 일으켰다. 당시 외환위기는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지만, 80년대 산업계 구조조정에서 살아남은 일부 대기업의 무분별한 사업확장ㆍ투자에 대한 견제장치가 미흡했던 점이 주 요인으로 꼽힌다.
◆"신성장동력 찾아라" 외치지만…쉽지 않은 현재
새 천년을 맞이하면서 국내 산업계는 새 먹거리 발굴에 나섰다. 가까이로는 몇해 전 큰 위기를 직접 몸으로 겪은 데다 그간 주력산업으로 내세웠던 분야가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이 격화됐기 때문이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에 따르면 반도체와 선박해양, 철강판 등은 국내 10대 수출품목에 꼽힌 지 36년, 석유화학이나 자동차, 컴퓨터도 20년을 훌쩍 넘겼다. 중국이나 인도, 브라질 등 신흥국에서는 세계적인 기업이 해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지만 한국은 최근 10년간 4개 늘어나는데 그쳤다.
선진국과의 격차를 좁히지 못하는 가운데 후발주자가 가파르게 추격하거나 이미 제친 분야도 여럿이라는 게 전경련 분석이다. 2000년대 들어 신재생에너지, 방송통신융합산업, 글로벌 헬스케어 등을 비롯해 중장기적으로는 태양ㆍ연료전지, 물처리, 녹색금융, 로봇응용, 신소재ㆍ나노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해 정부가 소매를 걷어부치거나 기업이 자발적으로 나서고 있으나 아직 괄목할 만한 성과는 없다.
전문가들은 한국경제의 성장잠재력이 저하되고 있는 가운데 새로운 산업을 발굴하는 데 실패하면서 일부 특정산업에 대한 의존도가 더욱 높아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2000년대 들어 서비스산업의 비중이 늘어나던 추세였다가 2008~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다시 제조업 비중이 높아지는 회귀현상이 나타났다. 미국, 유럽, 일본 등 주요 선진국의 제조업 경쟁력이 급격히 낮아진 데 따른 반사이득을 얻은 셈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 시절 대ㆍ중소기업간 동반성장을 화두로 내걸며 중소기업의 경쟁력을 끌어올리려고 했던 일이나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 직후부터 창조경제를 주창하고 있는 점은 기존의 산업구조나 패러다임으로는 다가올 30년을 대비하기가 쉽지 않다는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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