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곡 최순우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에서 분청사기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어른의 솜씨로 보면 너무 치기가 넘치고 어린이의 일로 보면 그 도안의 짜임새나 필력은 마치 요즘 화가들의 멋진 소묘에 비길 만도 해서 사뭇 근대적인 감각을 느끼게 해준다."
혜곡에 따르면 추상적인 무늬가 그려진 분청사기는 호남지방 각지에서 15세기 무렵부터 다량 생산된다. 대표적인 도요지는 무등산 금곡마을이었다. 분청사기는 약 150년간 제작된 뒤 명맥이 끊긴다.
조선에서는 어떻게 서양보다 500년 먼저 분청사기를 화폭 삼은 추상미술이 싹텄을까. 그 추상미술이 계승 발전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조선이 개국하자 해외시장이 막혔고 국내시장도 폐쇄됐다. 조선은 개국 이후 상당 기간 나라에서 사용할 도자기를 각 지방에서 진상받았다. 저마다 당대 최고의 예술가를 자부하던 도공들은 값을 쳐주는 시장도 작품을 알아주는 고객도 사라지자 예전처럼 완벽한 도자기를 빚을 동기를 잃어버리게 됐다. 숨막히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경쟁에서 풀려난 도공들은 예술적인 흥취를 붓 가는 대로 표현하게 됐고 그 결과 분청사기가 태어나게 됐다고 나는 상상한다.
분청사기는 조정에서 경기도 광주에 관요를 설치해 백자와 청화백자를 생산하도록 하면서 점차 생산이 줄었다.
백우진 국제부 선임기자 cobalt100@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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