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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의 습격]단군과 신국(神國)(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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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절은 다른 국가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빨간 날'이다. '하늘이 열린 날'을 기념할 수 있다는 건 대단한 자부심이다. 기원전 2333년(戊辰年), 즉 단군기원 원년 음력 10월 3일 단군이 최초의 고조선을 건국했음을 기리는 날이다. 음력과 양력의 갭이 있긴 하겠으나 꽤 오래된 옛날의 날짜를 기억해 온 국민이 쉬면서 기념한다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단군이 개국한 날이 아니라, 이보다 124년 더 거슬러 올라가 상원 갑자년(上元甲子年:기원전 2457년) 음력 10월 3일을 기리는 날이라고도 한다. 이 날은 단군의 아버지이자 하느님 환인의 아들인 환웅이 백두산에 내려와 신의 도시를 연 때이다. 고조선을 창업한 날이든, 환웅이 갓시티를 만든 날이든 여하튼 하늘의 아들과 손자가 이 나라를 연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런 믿음이나 스토리들이 황당하다는 견해를 펴는 종교인들도 적지 않지만, 기실 유태 종교의 천근(天根) 개념과 지구상에서 가장 닮아있는 뿌리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단군의 핵심은 신의 아들, 혹은 하늘의 자손이라는 개념이다. 우리가 인간의 아들이기 이전에 하늘의 아들이었다는 얘기이다. 이런 생각은 우리의 자부심을 채우기 위해 만들어진 스토리가 아니라, 청동기시대를 지나 철기문명으로 접어들면서 무기가 발달하고 종족간의 전쟁이 벌어지면서 생겨난다. 패자는 승자의 노예가 되면서 뚜렷한 신분이 생겨났고 차별에 항의하는 쿠데타가 수시로 일어나던 시절, 승자는 자신이 패자와 다른 종족임을 강조하기 위해 '뿌리'를 넘볼 수 없을 만큼 격상시켜놓았다. 그것이 하느님 아들 사상의 핵심이다. 우리는 하늘에서 내려온 종족이니, 땅의 종족인 그대들과 다르다. 그대가 우리가 자는 밤중에 건드린다면 우리가 징벌을 설령 못할지라도 하늘의 주벌(誅伐)이 있을 것이다. 이런 논리와 상징으로 패자들의 패역심을 누른 것이 천근신화의 배경이다. 특히 기마족이었던 우리 조상은 말을 타고 있는 상태의 높이를 하늘에서 내려온 종족의 이미지를 굳히는데 활용했을 것이다. 땅에 엎드린 자는 말을 타고 이동하는 자가 훨씬 더 하느님 가까이에 있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단군의 권력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그 미션에서 나왔다. 하늘과 소통하는 사람은, 하늘의 권능을 그대로 지닐 수 있어서 인간의 현세와 내세까지를 장악할 수 있으며 상벌 또한 내릴 수 있다고 믿었다. 일종의 무당이라 할 수 있는 단군을 부끄러워 하는 이들은, 이 문제를 얼버무리려 하기도 하지만, 단군의 핵심은 그 '무당'(신과 소통하는 자)의 역할에 있다. 우리 겨레는 단군조선 이후로 신과 소통하는 일을 정체성으로 삼아왔다고 볼 수 있다. 신라의 화랑은 바로 단군의 역할을 가장 적극적으로 승계한 것이다. 화랑은 신과 소통하는 자이며, 신과 어울릴 수 있도록 가장 아름다운 용모와 뛰어난 재능을 지닌 가장 순수한 나이의 사내(처음에는 여성이었다)가 뽑혔다. 고구려의 조의선인도 같은 역할을 한 사람들로 보인다. 고려시대 팔관회는 신과 소통하는 자에 대한 기억을 새겼던 화랑 추모연이었다. 조선의 유학자들에 와서, 보다 합리적이고 근대적인 사유를 추구하면서 신과 소통하는 일은 대부분 토속신앙으로 밀려났다. 하지만 여전히 궁궐이나 반가에서도 굿을 하는 것은 중요한 행사였으며 도교적 신념을 표현하는 행사와 관직, 건물들이 존재했다.

개천절을 맞으며 우리가 단군이 이 나라의 원천국가를 개창했다는 것을 새기는 것에 그치는 것은 참으로 허랑한 일이다. 이 나라 이 겨레가 신과 소통하는 것을 정체성의 핵심으로 삼았으며 그것이 다른 나라 다른 겨레들과 크게 다른 점이라는 신념을 살피고 이해하는 일이다. 동북아시아의 작은 국가가 오십년 만에 이토록 놀라운 성장을 하여 세계의 중심으로 다가가는 모습은, 저 홍익인간 제세이화의 글로벌한 사유와 닿아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큰 자기를 발견하는 힘, 광대한 공간과 광대한 시간 속에 흐르고 있는 자기를 느끼는 것. 그것만 해도 개천절은 가치있는 날임에 틀림없다.


'낱말의 습격' 처음부터 다시보기
이상국 편집에디터, 스토리연구소장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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