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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원 '저잣거리의 목소리들'‥비루하고 소소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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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규성 기자]
'저잣거리의 목소리들' 표지.

'저잣거리의 목소리들'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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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마는 소문의 여신이다. 여신의 궁전은 만물이 내려다 보이는 세상의 중심에 있다. 또한 수천 개 문이 언제나 활짝 열려 있어 세상의 웅성거림이 가득히 떠돌아 다닌다. 거기에는 침묵이란 없다. 거짓말은 물론 선동, 기쁨, 반란, 맹신, 비밀이 모여 들면 파마는 커다란 마이크를 통해 증폭시켜 온 세상에 퍼뜨린다.

근대 초기 신문은 파마의 후예다. 파마가 말을 수집해 뼈와 살을 붙여 세상에 되돌려보내듯 신문도 구어로 이뤄진 항간의 말을 문어로 바꿔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황주군 영풍면 안심촌 이승각 씨 부인은 본월 13일 밤에 해산했는데 어린 아이의 머리가 둘이고 꼬리가 하나고 양경과 음문이 하나씩이다. 수죽동 임응귀 씨의 집에는 암탉이 병아리 하나를 깠는데 병아리는 눈이 하나고 입이 둘이다. 그 고을 서북 서치홍 씨의 집에는 고양이가 새끼 하나를 낳았다. 그 새끼 고양이는 눈이 하나고 코는 없다. 홍주군 내동 등지에서는 암캐가 새끼 하나를 낳았다. 그 새끼 머리는 사람의 머리고 몸뚱이는 개의 몸뚱이더라."
문화학자 이승원

문화학자 이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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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5월22일자 대한매일신보의 '맹랑한 소문'이라는 기사의 내용이다. 1910년 민심은 흉흉했고 나라는 들썩였다. 맹랑한 소문이 저잣거리에 유통되고, 5월엔 지구가 혜성에 부딪쳐 멸망할 것이라는 얘기마저 돌아 백성들이 공포에 떨었다. 온갖 풍설을 만들고, 유통하는 저잣거리는 왜 이런 말에 곧잘 현혹됐을까 ? 그저 괴담 수준을 넘어 식민지로 전락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할 만하다. 이에 저자는 "당시 소문에 의한 사회적 불안감은 과학적 사유 부족 등 여러 이유가 있으나 소문 또한 당대 삶의 알레고리로 볼 수 있다"고 설명한다.

문화학자 이승원(사진)의 저술 '저잣거리의 목소리들-1900년 여기 사람이 있다'에서는 타임머신을 타고 그 혼미했던 시절로 돌아가 저잣거리를 누비며 천한 신기료 장수, 일본 유학을 가겠다는 기생, 황제의 순행길을 막고 데모하는 학생들, 도박 광풍에 휩싸인 사람들, 애국계몽 굴레에 갇힌 '얼개화꾼' 등을 만날 수 있다. 또한 당대의 물건과 풍속, 다양한 사건, 사고는 물론 일화들이 담겨 있다.

대한제국이 멸망하던 무렵, 당시 사람들은 유교 및 근대적 가치관의 충돌을 온 몸으로 견디며 혼돈과 격랑속을 살아 냈다. 우리는 대한제국의 모습을 명성황후 시해, 아관파천, 러일전쟁 등 굵직한 역사적 사건과 연관해서 사고한다. 그 안에는 커다란 사건부터 장삼이사들의 세상살이와 일상의 작은 소란, 소동들로 가득 차 있다.
"역사에 있어 큰 사건은 작은 사건의 퇴적이며 작은 것이 모여 큰 사건을 이룬다. 큰 역사의 심층을 작은 것의 역사로 볼 때 더 깊이 있게 알 수 있다. 그런 뜻에서 신문 등을 통해 일상적 삶을 조명해 보고 싶었다."

이 책은 근대 초기 신문의 만평을 함께 녹여내며 문학작품과 잡지에 담긴 방대한 자료를 섭렵하고 있다. 저자는 "대한민보 등 각 신문, 소설, 잡지 등 자료량이 많아 작업이 더디고 고됐다"며 "신문을 읽을 때는 독자의 눈으로 당시를 탐사했다"고 고백한다. 당초 책은 16년전에 구상했다.

저자는 저잣거리 풍경을 다루면서도 오늘날 우리가 겪는 문제의식도 놓치지 않는다. 여기서 포착된 대한제국은 주자학적 세계에서 서구 중심의 근대로 전환하며 몸부림친다. 혼돈과 격랑의 인간 군상은 지금도 여전하다. 책을 읽다 보면 대한제국은 지금의 일상을 구성하는 제도, 규율, 풍속과 문화, 습속을 잉태한 곳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당시의 사람들은 비록 생경한 구석이 없지는 않지만 오늘과 닮아 있는 모습도 보게 된다.

특히 이 책에는 '대한민보' 이도영 화백의 시사만평이 곁들여 있다. 이도영은 우리나라 최초의 시사만화가다. 이도영의 '벌거벗고 환도 찼군'이라는 말풍선을 단 만평을 보면 대한제국 관료 이병무를 욕심 사납게 부풀어 오른 배에 축 처진 젖가슴을 드러내고 훈도시만 입은 채 칼 찬 모습으로 그렸다. 고종에게 양위를 겁박하는 역적 이병무의 특성을 반영,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도영의 만평은 거리 풍경과 사람들의 생활상, 세기말의 세상사를 섬세하고 예리한 시각으로 포착하고 있다.

저자는 "이 화백의 시사만평 속 풍경이 내게 말을 걸기 시작하면서 책을 써야겠다는 결심이 생겼다"며 "어지럽고 혼미한 시대를 한 컷 공간속에 응축해낸 솜씨가 놀랍다"고 평가했다. 따라서 이 책은 100년전 근대 한국의 비루하고 사소한 얘기속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현실을 되돌아보는 탐조등이다.

한편 저자 이승원은 '세계로 떠난 조선의 지식인들', '학교의 탄생', '사라진 직업의 역사', 소리가 만들어낸 풍경', '1898, 문명의 전환', '국민국가의 정치적 상상력' 등 다양한 저술을 냈다. 현재 인천대학교에서 한국문학을 강의하고 있다. <이승원 지음/천년의상상 출간/값 1만7000원>




이규성 기자 peac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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