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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에 인간성을 불어넣어야 '스토리'···김남일 실천문학 신임대표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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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윤주 기자]“고향에 돌아와 기쁘고 즐겁습니다.”

경영이 위축된 출판사의 구원투수로 무거운 바통을 이어받게 된 신임 대표의 비장함은 없었다. 3년 전 위암 발병으로 위의 4분의 3을 절제해 창작활동을 중단했으며 완치 판정까지 좀 더 기다려야 하는 소설가의 불안도 없었다. 김남일 실천문학 신임 대표(57)는 "안 되면 떼를 써서 원고 내놓으라고 하죠, 뭐!"라며 호쾌하게 웃었다. 그는 1981년도에 실천문학에 입사해 편집장, 편집위원, 편집주간 등을 거쳤다.
“실천문학은 어떻게 되든 말든 작가들이 그냥 내버려두는 출판사가 아니에요. 책을 팔아 수익을 내야 하는 건 다른 출판사와 같겠지만 우리가 이어가야 할 정신과 역할이 있기 때문이죠. 대표가 됐다고 해서 혼자 감당할 일도 아닌 데다, 동료 작가들과 그간 쌓아왔던 시간이 든든하니 큰 걱정은 없습니다.(웃음)”

1980년 3월 군사독재 치하에서 문예지 다수가 폐간당하고 문예활동이 봉쇄됐던 시기, 이문구·고은·박태순 등을 주축으로 진리에 목마른 예술인들이 주머니를 털어 ‘실천문학’을 탄생시켰다. 이 이름에는 삶과 문학, 문학과 사회의 통일을 추구했던 정신이 배어 있다. 그리고 34년이 흘러, 스마트폰 하나로 일상의 대부분을 해갈(解渴)할 수 있는 세상이 오기까지 실천문학은 ‘엄중하나 고독한’ 이름을 이어왔다.

‘자기계발’에서 ‘힐링’으로 이어지는 트렌드에 전통적인 소설과 시가 설 자리는 좁아진 지 오래다. 30여년간 아프고도 치열한 작품세계를 펼쳐온 소설가답게 김 대표는 ‘이야기(서사)’가 실종된 사회의 메마름을 지적했다.
김남일 실천문학 대표

김남일 실천문학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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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사람들에게는 정보가 넘치죠. 그런데 정보는 일방적이어서 사유할 틈을 쉽게 주지 않습니다. 필요한 것만 쏙쏙 받아들이면 되니까요. 그러나 인간이 지성을 발휘하고 감성을 어루만질 여지를 주는 ‘이야기’야말로 디지털 세상에 인간성을 불어넣기 위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를 내다본 발터 벤야민은 이미 100년 전에 ‘정보’와 ‘이야기’를 구분해야 한다고 했죠.”

사는 게 바쁘고 힘든 사람들에게 이야기가 스며들 틈이 없는 건 아닐까 묻자, 김 대표는 옆에 있던 도자기를 가리켰다.
“도자기를 보고 ‘얼마짜리야?’라는 반응이 먼저 나오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훈련된 결과일 겁니다. 그러나 잠시 숨을 골라 도자기 만든 사람의 숨결과 손때를 상상하는 것, 이야기는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되죠. 사는 게 힘든 독자들마저도 스토리로 끌어들일 수 있는 능력이 우리 작가들에게 있습니다. 그 서사의 힘을 믿고 출판인들은 좋은 이야기를 부지런히 발굴하는 풍토를 만들어야 합니다.”

좋은 책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만들어야 잘 팔릴까. 모든 출판인들의 갈등 한가운데 있을 질문으로 돌아갔다.
“대중성을 규정하는 건 정말 어려워요. 흔히 ‘쉽고 가벼운 것’이 대중적인 것이라 판단하기 쉬운데 오해입니다. ‘작정하고’ 펴내도 결과가 좋지 않았던 사례가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대중을 함부로 판단하기보다는 우리의 방식 안에서 소통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이른바 ‘힐링’을 콘셉트로 잡더라도, 예컨대 고공농성하는 노동자를 위로하는 이야기는 모두의 지친 마음을 동시에 위로하는 것 아닐까요? 말하자면 ‘연대’하는 힐링이죠.”

김 대표는 서재에서 ‘탄광마을 아이들’이라는 동시집을 꺼냈다. 1990년에 1쇄를 출간하고 2012년 19쇄를 펴내기까지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 책이다. 그는 “탄광은 마냥 ‘예쁜’ 소재는 아니지만, 아이들이라고 현실 바깥에 있지는 않다”며 “탄광마을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가난하지만 정직하고 따뜻한 삶을 꾸려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우리의 힐링”이라고 말했다. 달콤한 말만이 힐링이 아니라는 그의 철학은 단단했다.

“독자들이 ‘실천’이라는 말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문학이 과거처럼 ‘시대의 메가폰’은 아니지만 여전히 소수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그릇이고 이러한 문학의 장을 펼쳐주는 것은 출판인의 몫이에요. 실천문학이 새로워지고 젊어지는 데 바탕을 만들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김 대표는 “아직 밝히긴 어렵지만, ‘잘나갈’ 책이 상반기 하나, 하반기 하나 있다”고 귀띔했다. 시대를 껴안으며 독자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호흡할 새 책들을 꿈꾸는 출판인의 미소가 청연했다.



이윤주 기자 sayyunju@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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