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Dim영역

[아,저詩]신경림의 '누항요'

스크랩 글자크기

글자크기 설정

닫기
인쇄 RSS
이제 그만둘까 보다. 낯선 곳 헤매는 오랜 방황도./황홀하리라, 잊었던 옛 항구를 찾아가/발에 익은 거리와 골목을 느릿느릿 밟는다면./차가운 빗발이 흩뿌리며, 가로수와 전선을 울리면서./꽁치 꼼장어 타는 냄새 비릿한 목로에서는/낯익은 얼굴도 만나리, 귀에 익은 목소리도 들리리./(……)

신경림의 '누항요'
■ 누항(陋巷)은 누추한 골목을 의미하니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이며, 요(遙)는 그것이 멀리 있다는 뜻이니, 바로 가난했던 고향 옛마을을 가리킨다. 이 나라에서 가장 큰 도시인 서울에 몰려든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이 실향민이다. 서울보다 가난한 도시에서 살다가 인생을 좀 업그레이드 시켜볼까 하고 이곳으로 올라왔다. 고향을 멀리멀리 떠나는 길을 우린 인생의 발전이라 믿었고 환경의 진화라고 믿었다. 천만명이 모두 삶을 향상시킨 도시라면 천국이라고 할 만하지 않은가. 그 도시에서 우린 정말 행복한가. 우린 정말 대단한 것을 찾아냈는가. 이 부글거리는 욕망의 또 다른 누항을 깨달은 지도 오래 되었건만 뭘 더 기대하며 여기에서 이토록 미적거리고 있는가. 행복이 있을 만한 새로운 곳을 찾아내는 일, 기쁨이 있을 만한 새로운 시간을 기다리는 일에 번번이 속아왔는데, 왜 우린 여기서 이 관성적인 질주를 멈추지 못하는가. 행복은 새로운 곳, 새로운 경험, 새로운 문명에 있지 않다는 것. 이 뼈아픈 각성이 신경림에게 누항요를 부르게 하는 것이다. 한 걸음 마음을 뒤로 물려, 돌아가자. 옛날의 낯익은 얼굴들과 순박한 이웃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서 가난하고 욕망없는 그 자리에 누워보자. 정말 그때는 아무런 의심도 실망도 없이, 고통도 외로움도 다 편한 헌옷처럼 누리지 않았던가.

빈섬 이상국 편집부장ㆍ시인 isomis@





AD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함께 본 뉴스

새로보기

이슈 PICK

  • [포토] 외국인환대행사, 행운을 잡아라 영풍 장녀, 13억에 영풍문고 개인 최대주주 됐다 "1500명? 2000명?"…의대 증원 수험생 유불리에도 영향

    #국내이슈

  • "화웨이, 하버드 등 美대학 연구자금 비밀리 지원" 이재용, 바티칸서 교황 만났다…'삼성 전광판' 답례 차원인 듯 피벗 지연예고에도 "금리 인상 없을 것"…예상보다 '비둘기' 파월(종합)

    #해외이슈

  • [포토] '공중 곡예' [포토] 우아한 '날갯짓' [포토] 연휴 앞두고 '해외로!'

    #포토PICK

  • 현대차 수소전기트럭, 美 달린다…5대 추가 수주 현대차, 美 하이브리드 月 판매 1만대 돌파 고유가시대엔 하이브리드…르노 '아르카나' 인기

    #CAR라이프

  • 국내 첫 임신 동성부부, 딸 출산 "사랑하면 가족…혈연은 중요치 않아" [뉴스속 용어]'네오탐'이 장 건강 해친다? [뉴스속 인물]하이브에 반기 든 '뉴진스의 엄마' 민희진

    #뉴스속OO

간격처리를 위한 class

많이 본 뉴스 !가장 많이 읽힌 뉴스를 제공합니다. 집계 기준에 따라 최대 3일 전 기사까지 제공될 수 있습니다.

top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