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정신, 쓸쓸하고도 지독한 형벌"..김주영을 읽다
[아시아경제 이규성 기자]객주 완간 두달, 작품 못지 않게 김주영의 작가정신을 주목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객주가 탄생한 사역의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작가에게는 쓸쓸하고도 지독한 형벌이 부여돼 있음을 읽게 된다.
"문장의 전통을 알고 쓰는 사람이다. 글은 잘지 않으나 구름에 목 매달 듯 희떱지 않고, 안반치는 소리마냥 질기고 무디나 밖을 내다보게 답답하지 않고 한 배에 쌍둥이가 더러 나와도 씨다른 자식들처럼 부산하지 않다."(고(故) 이문구, 소설가)
"타고난 이야기꾼으로 원고지 1만장이 넘는 방대한 소설의 시공속으로 독자가 그의 붓끝을 충실하게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은 단순한 재능의 소산이 아니다."(김종철, 평론가)
우리 문학 만년작 중 하나인 '객주'의 작가 김주영에 대한 찬사다. 수많은 문학인들이 인정했 듯이 이야기를 풀어내는 입담은 작품 배경만큼이나 유장하다. 그러나 김주영은 객주 연재를 마친 1984년 제 9권을 내놓은 지 30여년만에 울진, 봉화의 옛 보부상과 그들의 유물, 당시를 살다간 사람들에게 헌사를 바치는 것으로 10권을 마무리했다.
우리는 작가가 겪은 산고, 감옥같이 지독한 외로움에는 크게 주목하지 않는다. 9권을 쓴 이후 10권을 쓰는데 걸린 30여년의 시간에 대해 "생애의 전체가 불편했다"는 술회에서 작가의 속내를 읽을 수 있을 뿐이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무엇보다도 한국 고유의 언어를 복구하려는 노력으로 나타난다. 대대로 전수된 옛말과 속담의 활용, 민간에 유통된 비유와 사설의 구사, 민중 풍속에 밀착된 재담과 육담의 연출이라는 면에서 객주를 능가하는 소설은 없다. 더욱이 그것은 다양한 대중서사 장르의 혼성물이다. 신분과 지역의 경계를 넘나드는 상인들의 모험은 피카레스크 소설 코드, 숱하게 많은 모략과 복수의 이야기는 의협 활극 코드, 계급과 장소에 특유한 인생살이 묘사는 풍속소설 코드, 작중 곳곳에 박힌 격언과 요설과 타령은 구술 연희 코드와 연결돼 있다. 그런 점에서 객주는 고유 언어의 보물창고일 뿐만 아니라 대중서사의 백과전서이기도 하다. "(황종연, 문학평론가)
우리는 그저 "대중서사의 백과사전", 객주로부터 입은 수혜에 감복한다. 객주의 질박한 언어는 청송감호소 출소자와의 일화에서 어떤 감화가 일어났는 지 잘 드러난다. 김주영이 보부상길을 여행하던 중 어느날 이른 아침 청송감호소 앞 점방에 앉아 있는데 허름한 행색의 출소자 한사람이 담배를 요청했다. 김주영은 아예 피우던 담배갑과 라이터를 줬다. 그러자 출소자는 "감방에서 제소자들한테 가장 인기있는 책"이라며 객주 여러 권을 답례로 건넸다.
"장기수들은 객주속에 나오는 성애 장면을 읽으며 감옥에서의 시름을 달랬다나 뭐래나 ? 암튼 객주를 읽어보라고 권유를 받은 건 처음이었어."
객주를 완성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보다 김주영의 치열할 작가정신을 빼놓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김주영은 객주를 쓰는 동안 한개의 어휘를 찾으려고 이희승 국어사전을 맨앞에서 끝까지 밤새 뒤진 적이 수십번이라고 술회한 적 있다. 나중에 개인용 객주사전을 별도로 만들었을 정도다.
이후 김주영의 영향을 받아 수많은 작가들이 작품을 쓰는 동안 나무, 풀, 꽃, 산, 강, 지명 등 자기만의 사전을 만들어 쓸 정도였다. 이처럼 화석화된 한글을 찾아 문학 언어로 재현해 놓은 작업은 문학의 역할이다. 객주를 시작할 당시 우리말 갈래사전도 없고 조선왕조실록도 한글 번역에 안 된 상태였던 점을 감안하면 객주는 그 역할에 매우 충실한 셈이다.
따라서 객주가 우리 문학사에 끼친 영향은 문학계에 '객주문학'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열어 상업자본주의를 다룬 수많은 아류를 이끈 것 못지 않게 국어학 및 역사학에도 동기 부여한 점을 꼽을만 하다. 초기 자본주의 생성과정에 대한 연구 및 우리말갈래사전 편찬에도 수많은 영감을 불러 일으켰다는 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부분이다.
김주영은 "객주를 쓸 당시 초기 자본주의와 관련 경제사료가 전무하다시피 했다. 역사학도도 아닌 나로서는 문학적 상상력, 열정만으로 끌고 나가기에는 힘이 부쳤다. 인문학적 한계에 부딪치면서 다시 공부하고 난 다음 쓰자는 게 많은 시간이 걸렸다"고 고백한다.
여러 역사 기록을 찾아가며 작업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이다. 김주영은 객주를 쓰는 동안 배낭에 낡은 지도를 들고 돌아다니느라 간첩으로 오인받은 적도 여러번이다. 대학노트를 싸들고 전국을 유랑하며 면 소재지의 여관이나 여인숙에서 글을 썼다. 답사와 창작을 병행하며 일주일치 원고가 완성되면 신문사로 보낸 다음 또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기를 반복하며 전국을 휘돌았다. 오늘날처럼 네비게이션도 구글어스도 없던 시절, 북한 지명과 산천의 모습을 담아내기 위해서도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했다. 김주영은 "남북 교류가 이뤄진 후 북한지도를 구해서 보니 산천 지명은 물론 지역 형세가 완연히 똑같아 나조차 놀랐다"고 말한 적도 있다.
30여년만에 객주를 완성할 수 있게 해준 것은 다름 아닌 십이령 보부상비다. 십이령 보부상비는 일제 때 보부상들이 십시일반, 철로 제작해 백두대간에 세운 송덕비다. 김주영은 4년전, 흥부장(청송)과 춘양장(봉화)을 넘는 십이령 여행길에서 보부상비석, 보부상길을 발견하고는 소금을 나르는 보부상의 원형을 만나면서 다시 펜을 잡을 수 있었다. 즉 울진 죽변항에서 내륙 봉화로 이어지는 소금길인 십이령 고개가 그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30여 년만에 객주 10권이 씌어질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한편 김주영은 1939년 경북 청송에서 태어나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70년 '여름사냥'이 '월간문학'에 가작으로 뽑히고, 1971년 '휴면기'로 '월간문학' 신인상을 받으면서 문단에 나왔다. '객주', '활빈도', '천둥소리',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 '화척', '홍어', '아라리 난장', '멸치', '빈집', '잘 가요 엄마' 등이 있다. 또 유주현문학상(1984) 대한민국문화예술상(1993) 이산문학상(1996) 대산문학상(1998) 김동리문학상(2002)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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