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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어떤 결혼식 풍경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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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결혼식의 백미는 주례였다. 꾸부정한 어깨, 많이 나오진 않았지만 이미 느긋해진 배, 정수리 언저리가 눈에 띄게 벗겨졌으며 그 밑에 두툼한 얼굴, 무뚝뚝한 표정, 중소기업 임원이란 그는 어눌한 말투로 이렇게 시작했다.

"오늘 준비한 주례사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20분짜리고, 다른 건 3분짜리입니다. 어떤 걸로 할까요?"
하객들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의사를 표시했고, 그는 예상했다는 듯 양복 주머니에서 3분짜리 원고를 꺼내는 것이었다.(틀림없이 20분짜리는 준비하지도 않았으리라) 그리고는 신랑에게 퀴즈를 내면서 맞춰보라고 했다.

"이 세상에서 특별히 힘든 일이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내 생각을 타인에게 주입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남의 호주머니에 있는 돈을 내 호주머니로 가져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전자를 잘하는 사람을 우리는 선생님이라고 하고, 후자를 잘하는 사람을 사장님이라고 하지요. 그러면 이 두 가지를 모두 잘하는 사람이 있는데…. 신랑은 그게 누군지 아시나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신랑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고 문제의 주례는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신랑, 정답은 지금 당신 옆에 서있는 사람, 바로 와이프입니다. 그러니까 신랑은 오늘부로 선생님이자 사장님인 분을 모시고 함께 살게 된 것입니다. 축하합니다."(글쎄, 그게 축하할 일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지.)

그 뒤의 말씀은 뭐 그저 그랬다. 다투지 말고 애 많이 낳아 오래오래 잘 살라는…. 약간의 재치가 가미됐을 뿐 평범한 주례사였지만 여운이 있었다. 주례를 어디서 본 듯도 했다. 그래서 그냥 집으로 돌아갈까 하다가(늦은 아침을 먹고 온 터라 배가 더부룩했다) 식당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눈으로 그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그도 늦은 아침을 먹고 온 걸까?)

대신 묘한 광경이 눈에 잡혔다. 하객이 거의 빠져나가 썰렁한 식장 한구석에서 20대 후반 또는 30대 초반의 한 여성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었다. 연신 흘러내리는 눈물과 화장이 뒤범벅됐지만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미모였다. '어, 이 상황은 도대체 뭐지?' 집에 가는 것도 식당에 가는 것도 잠시 잊은 채 모락모락 끓어오르는 새로운 호기심에 사로잡힌 것이다.
 
<치우(恥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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