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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영 20년] (상)삼성을 바꾼 3번의 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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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6월 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신경영 회의를 주재하고 있는 이건희 회장

1993년 6월 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신경영 회의를 주재하고 있는 이건희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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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명진규 기자]1993년 6월 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캠핀스키 호텔. 이건희 회장이 테이블에 앉아 담배를 꺼내 물었다. 조금이라도 마이크에 입을 가까이 가져다 대기 위해 고개를 살짝 숙인채 양팔을 벌려 테이블을 짚고 있다.
좌중을 노려 보는 눈은 장시간 비행의 피로도 잊은듯 회의에 참석한 임원들을 주시하고 있다. 이 회장의 옆에는 꽁초가 수북히 쌓인 재털이가 놓여있다. 잠시 침묵이 이어진 뒤 강연이 시작됐다.

"제대로 하자. 하루 2~3시간 일해도 된다. 나머지는 집에 누워도 좋다.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꾸자. 내가 회장자리에 앉아보자는 생각을 가져보자."

격앙된 목소리로 이 회장이 모든 것을 다 바꾸자고 외쳤다. 1987년 삼성그룹 회장이 된 이후 5년, 1967년 동양방송 이사로 삼성에 발을 들여 놓은지 25년이 지났다. 불면증이 생긴지 벌써 오래였다. 21세기까지 이제 7년 밖에 남지 않았지만 삼성은 여전히 1970년대를 살고 있었다. 이 회장이 말을 이어갔다.
"작은 것부터 바꿔라. 우선 나부터, 그리고 마누라와 자식을 부탁하든 협박하든 변화시켜야 한다. 나 자신 먼저 변하자. 실천하지 않는 발상은 필요 없다."

이 회장은 꼬박 6시간을 잠시도 일어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회의에 참석했던 임원들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한국 최고의 삼성'이라는 자부심으로 살아왔지만 최근 수개월 동안 이 회장과 함께 한 행보는 '우물안 개구리'라는 말을 실감케 할 정도였다.

◆신경영, 68일간의 대장정=이 회장은 1987년 삼성그룹 회장에 취임한 뒤 5년간 외부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은둔의 경영자'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하지만 1993년 2월부터 8월까지 총 68일 동안 200명의 삼성그룹 주요 임원들과 함께 미국, 일본, 독일, 스위스, 영국 등 전 세계에서 특강을 펼친다.

이 회장의 신경영은 미국 LA, 일본 동경, 독일 프랑크푸르트 등 3개의 회의로 대표된다. 삼성을 바꾼 3개의 회의다. LA 회의는 삼성의 현실을 바로 알고 미래에 대해 준비하자는 이 회장의 안타까운 심정이 잘 드러난다. 동경 회의속에서는 세계속의 한국, 그리고 삼성을 위한 세계화의 염원을 전달했다. 프랑크푸르트 회의에서는 국제화, 복합화를 비롯해 양을 버리고 질적 시대를 준비하자는 것이 요지였다.

지금으로부터 20여년전 이 회장은 신경영을 통해 삼성은 물론 우리나라 사회 전반에 걸친 구태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20여년이 지난 현재 삼성은 신경영을 얼마나 달성했다고 느끼고 있을까? 삼성의 대답은 한결같다. 이 회장은 올해 초부터 "지금이야 말로 진짜 위기"라고 강조하고 나섰고 삼성그룹은 20여년전의 신경영을 젊은 세대의 직원들에게 가르치며 재 조명하고 있다.

◆LA 회의 "우리 삼성 제품은 어디있나?"=1993년 2월 이건희 회장은 미국 로스앤젤레스(LA)로 향했다. 이 회장은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수행원들과 함께 시내에 있는 전자제품 매장을 찾았다. 매장에는 제너럴일렉트릭, 소니, 파나소닉 등 미국과 일본의 가전제품들이 가득했다. 삼성전자 제품을 찾았지만 아예 볼 수 없었다.

매장을 돌아다니던 이 회장은 한쪽 구석에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는 삼성전자 제품을 발견했다. 이 회장은 센츄리 프라자 호텔로 향했다. 그리고 비서실에 호텔의 대형 행사장을 통째로 빌려 세계 주요 전자제품 78개를 삼성 제품과 비교전시했다.

한국에 있는 삼성전자 사장단도 모조리 호출해 ‘전자부문 수출상품 현지 비교평가회의’를 열었다.

이날 회의는 경영진에게 이 회장이 사업 현황점검을 위한 질문을 한 뒤 각종 지시사항을 전달하는 것으로 이뤄졌다. 가장 먼저 제품 품질에 대한 질책이 이어졌다.

"이번에 LA에 온 전자 사장, 임원들은 미국의 전자제품 매장을 직접 둘러보고 그들이 우리 제품을 진열해 놓은 꼴을 보고 우리 상품이 얼마나 천덕꾸러기가 되어 있는지 또 한쪽 귀퉁이에 얼마나 많은 먼지가 쌓여 있는지 똑똑히 보고 왔을 것이다. 2등은 현상유지밖에 안되고 못 큰다. 2등, 3등은 맨날 바쁘다."

0.1점과 10점의 차이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이 회장의 '1등 주의'가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올림픽에서 0.1점에 순위가 결정된다. 경쟁이 뭐냐? 옜날엔 0.5초 차가 분명히 진거고 요즘은 0.1차라도 진것은 진 것이다. 나는 0.1차로 10등을 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10점 차로 2등 해봐야 아무 소용없다. 개방화, 지구화의 이 시대에 각축전을 벌이는 국제적 선두그룹, 1군에 들어가 있다. 0.1점이라도 남이 잘하면 내가 진 것이다."

◆3월 동경 회의, 노기 누그러뜨린 이건희 회장=LA 회의를 마친 뒤 이 회장은 일본 동경으로 향해 사장단 회의를 주재했다. 당시 사장단은 '이것이 경쟁력이다'라는 KBS 프로그램을 함께 시청한 뒤 이 회장과 비서실의 대담으로 이뤄졌다. LA 회의에서 제품 품질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던 이 회장의 노기는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내 자신이 벌써 15년 전 부회장으로서 삼성을 이어간다는 시점에서 떠든 소리가 오늘 여기에서 떠드는 것과 단어가 바뀌고 개념이 약간 차이날 뿐 기본정신은 70~80% 같은 소리인데도 결국 안듣고 있습니다. LA 회의 역시 그래서 열게 됐습니다. 제품을 갖고 예를 들고 이 가게에 가봐라, 이 물건이다 등을 지적해주니 이제 좀 알아듣는 것 같습니다."

이날 비서실은 LA 회의 이후 임직원 5000명의 의식조사에 대한 결과를 소개했다.

"대리부터 시작해서 상무까지 5000명의 회장님 말씀에 대한 의식조사를 진행했습니다. 이제까지 우물안 식 사고와 안일한 행동에 머물러 있던 것을 깊이 반성한다는 얘기부터 초일류 기업 삼성을 위한 방안으로서 위로부터 진정한 정신혁명, 기술개발, 품질혁신, 인재양성, 공격적 경영이 필요하다는 의견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조급하게 추진하고 성급하게 성과를 챙기는 것이 아니라 목표한 일은 끝까지 집요하게 추구하는 강인한 체질로 바꿔야 한다는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이건희 회장은 비서실의 임직원 의식조사 결과에 대해 크게 만족한 듯 하다.

"내 이야기의 80~90% 정도는 이해한 것 같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나보다 더 예리하고, 더 눈을 부릅뜨고 있는 것도 같고. 좋은 뜻에서 견제도 하고 있고. 나도 아침에 그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국가적으로도 기업으로도 어려운 시기에 정말 배수진을 치고 막차를 타고 가는 상황이지만 그나마 여러분의 말 한마디씩 들어본 것으로서 상당한 공감대를 형성했습니다."

◆6월 프랑크푸르트 회의 "모두가 나를 속였다"=1993년 6월에 열린 프랑크푸르트 회의에서는 이 회장의 분노가 절정에 달한다. '후쿠다 보고서'와 SBC 냉장고 파문이 진원지였다. 당시 회의록에선 이 회장은 배신감까지 토로하고 있다. 일본서 가진 동경 회의와는 전혀 상반된 분위기에서 회의는 진행됐다.

후쿠다 보고서는 일본인 고문 후쿠다가 삼성전자의 문제점에 대해 조목조목 비판한 보고서다. 이 회장은 프랑크푸르트 출장 직전 후쿠다 고문과 관련해서 회의를 한 뒤 비행기 안에서 보고서를 정독했다. 보고서를 다 읽은 뒤 이 회장이 보인 감정은 격노에 가까웠다.

“나는 평생 낙관적이고 긍정적으로 살아왔다. 웬만한 실수나 수십, 수백억원의 손해에도 눈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화가 몹시 치밀어 올랐다. 지금까지 사장들, 비서실장, 비서실 팀장들이 모두 나를 속였기 때문이다. 집안에 병균이 들어왔는데 5년, 10년 동안 나를 속였다. 내 측근들이 이 정도 라면 나머지 사람들은 어느 정도였겠는가.”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한 뒤에는 사내 방송국 SBC가 촬영한 품질관련 비디오를 시청했다. SBC는 삼성전자 냉장고 조립라인을 촬영했다. 그 안에는 규격이 맞지 않는 부품을 칼로 깍아내 억지로 끼워맞추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누구도 불평하지 않고 칼로 깍는 모습을 보면서 이 회장은 길게 탄식까지 했다.

"오늘 삼성전자의 불량을 담은 테이프를 보았다. 테이프 내용 자체가 대단한 것은 아니다. 고발, 위기 의식을 가지라는 뜻에서 홍보팀을 시켜 구석구석 잘못을 찾아내라고 했다. 그게 대단한 것은 아니다. 그 정신이 대단하다. 썩었다. 완전히 썩었다. 내 자신이 후계자가 된게 1970년대 말이다. 그때부터 모든 제품의 불량을 암이라고 했다."

200명에 달하는 임원들을 전부 프랑크푸르트로 호출한 이 회장은 장장 6시간에 걸쳐 강한 어조로 회의를 진행했다. 변하고 있다고 생각한 삼성은 20년 동안 전혀 변한 것이 없었다. 여전히 과거와 똑같았던 것이다.

프랑크푸르트 선언과 함께 이 회장은 자신이 직접 나서 임직원들을 변화시켜야 겠다고 생각한 뒤 과장급 이상 직원들의 교육에 나선다. 매일 4시간씩 자고 강연을 주재했다. 6월 7일부터 시작한 강연은 24일까지 계속됐다. 품질을 중심으로 한 '질의 경영'이 화두였다.

"질의 경영이란 2류가 1류 되자는 것이다. 서로 절대적 개념은 아니다. 경영합리화다. 질의 제고는 불량을 없애는 것이다. 설계, 기획, 디자인, 생산, 판매 분야가 자주 모여 합리적인 방안을 찾아라. 모여서 결정을 내리면 제발 설계 변경하지 마라. 회의실이 왜 있는가. 담배 피우고 하품이나 한다. 회의 다운 회의를 하면 불량이 없어진다."

이 회장은 6월 25일에는 스위스 로잔에서 강연을 한 뒤 27일에는 영국으로 자리를 옮겨 주재원들을 대상으로 특강했다. 7월 2일에는 청와대 초청으로 인해 일시 귀국한 뒤 4일부터 9일까지는 다시 동경에서 회의를 주재에 특강을 진행했다.

13일에는 일본 오사카에서 중앙일보 임직원을 대상으로 특강을 하고 15일부터 28일까지는 오사카, 후쿠오카, 동남아 주재원들을 대상으로 특강에 나선다. 당시 심경을 밝힌 이건희 회장의 말이 눈길을 끈다.

"나는 내 청춘과 재산과 생명과 명성을 걸고서 여러분들 보고 마음대로 해보라고 하는데 그 반도 못 따라오고 있다. 전자는 20년 전부터 해온 이야기를 안 듣고 있다. 그동안 수백 번 속아온 것이다. 정말 이런 종류의 회의는 오늘로 마지막이다."




명진규 기자 a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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