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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도우미' 박씨가 거리로 나선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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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기준법 적용 제외로 고용불안 가중
아기돌보미·산후조리사·요양보호사도 노동자로 인정해야


▲ 5일 낮 '돌봄노동자법적보호를위한연대'가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ILO 가사노동협약 비준과 가사간병노동자의 법적 보호를 위한 법 개정을 촉구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 5일 낮 '돌봄노동자법적보호를위한연대'가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ILO 가사노동협약 비준과 가사간병노동자의 법적 보호를 위한 법 개정을 촉구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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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조인경 기자] "아주머니,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요즘 손이 많이 느려지신 거 같아요? 제가 부탁드린 곳도 자꾸 빼먹고 하시고……."
가사도우미 박일선(50, 서울 천왕동)씨는 지난주 고객으로부터 '걱정 어린' 클레임을 받았다. 십년 가까이 일해 온 집이라 제법 익숙한 살림이지만 한 번도 요령을 피우거나 대충대충 시간을 때우려 한 적은 없었는데, 고객에겐 뭔가 불만이 쌓인 모양이었다.

사실 박씨의 일이란 건 늘상 비슷하다. 고객 집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빨래를 모아 색상과 소재별로 분리해 세탁을 시작한다. 세탁기가 돌아가는 동안 쌓인 설거지와 주방 정리를 마치고 나면 행주와 속옷 등 삶을 빨래를 가스레인지 불에 올린다. 탈수된 세탁물을 널고 방마다 이불을 털어 반듯이 개어놓은 다음, 청소기로 먼지를 치우고 손걸레질까지 마친다.

박씨는 "50평대 집에서 이 정도 일을 다 끝내려면 약속한 4시간도 빠듯하다"며 "하지만 고객들은 틈틈이 욕실이나 베란다, 창틀 청소도 해 줄 것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오전과 오후로 나눠 매일 두 집 정도를 맡아 일하던 김씨는 4년 전 갑작스레 '구안와사(안면신경마비)'가 왔다. 어쩐지 입술에 감각이 없는 것 같다고 느꼈을 때 바로 병원에 갔어야 하는데 일을 하던 중이라 시간을 지체한 게 탈이었다. 이튿날부터 혀와 입이 완전히 돌아가 말을 하기는커녕 음식을 먹지도 못했고, 두 눈은 퉁퉁 부어 감기지도 않았다. 의사는 과로와 스트레스가 원인이라고 했다.

넉 달 동안 침을 맞고, 신경 맛사지를 받고, 이런저런 약들을 먹고 나서야 겨우 회복됐지만 아직도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얼굴에 마비 증세가 느껴진다.

그렇다고 무작정 일을 관둘 수도 없었다. 18년 전 택시 강도를 당해 머리를 크게 다친 남편이 이따금 공공근로를 나가서 받아오는 돈으로는 두 아이 끼니마저 걱정해야 하는 처지였다. 동사무소와 구청 복지과를 찾아가 보기도 했지만 박씨가 가사도우미 일 정도는 할 수 있다는 이유로 받을 수 있는 혜택은 거의 없었다. 가족은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 말이 나오고 손발을 움직일 수 있는 정도가 되자 박씨는 다시 일을 나섰다. 예전처럼 여러 집의 일을 하지는 못하니 한 달에 손에 쥐는 돈은 겨우 100만원 남짓이다.

요즘 들어 박씨는 부쩍 다리가 아프고 허리 통증을 느낀다. 설상가상으로 한 쪽 손이 자꾸 저려와 신경이 쓰이는데 고객도 눈치를 챈 것 같다. 박씨는 "아이들이 이제 갓 취직한 상태니 내가 십년은 더 벌고 싶다"며 "가사도우미 일을 관둬야 할 경우를 대비해 요양보호사 자격증이라도 따둬야 하나 싶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김씨처럼 가사도우미, 아기돌보미(육아도우미), 산후조리사, 요양보호사, 간병인 등 소위 '가사노동자'로 분류되는 50여만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정당한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해 아무런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토로하고 있다. 스스로를 '돌봄서비스 영역에 종사한다'고 표현하는 이들은 "노동자로서 산업재해와 고용불안 속에서 더 이상 소외되지 않고 안정된 환경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전국가정관리사협회 손영주 사무국장은 "가사·간병노동자도 임금을 목적으로 근로를 제공하는 명확한 노동자이고 사회적으로도 그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며 "하지만 이 노동이 사적 공간인 개별 가정에서 이뤄져 국가가 개입하기 어렵고 계약 관계가 불분명하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노동법을 적용하지 않는 것은 시대역행적인 판단"이라고 지적했다.

현재 국내 근로기준법은 제11조항에 '이 법은 가사사용인에 대하여는 적용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때문에 가사노동자들은 갑자기 일을 그만두더라도 실업급여를 받을 수 없는 것은 물론 퇴직금이나 유급휴가는 생각도 할 수 없다. 심지어 고객 집에서 욕실청소를 하다 넘어지거나 환자를 부축하다 허리를 삐끗해도 자기 돈을 들여 치료를 해야 한다.

이들은 터무니 없이 적은 임금도 현실화해야 하지만 그보다는 노동자답게 일할 권리가 더 절실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씨와 같은 가사도우미들은 "가사일도 상당한 노동력을 필요로 하지만 시간을 정해 일하다 보니 도중에 잠시 앉아 쉬거나 커피 한 잔 마시는 것도 상당히 눈치가 보인다"고 토로했다.

노인요양사들의 고충도 만만치 않다. 한명선(43, 서울 고척동)씨는 "시설에서 2교대로 근무도 해 봤고, 재가(가정내) 요양보호사로 하루 종일 환자를 돌보기도 했지만 내 가족도 힘들어 남에게 맡기는 판에 돈 받고 일하는 우리는 골병이 들기 일쑤"라고 말했다. 한씨는 "병상에 계신 할아버지가 내 허벅지와 엉덩이를 만졌는데도 어디에다 '성추행당했다'고 신고할 곳도 없다"고 하소연했다. 한씨가 한 달에 받는 월급은 150만원이 안된다.

지난해 국제노동기구(ILO)는 가사노동자의 노동권을 보장하는 내용의 '가사 노동자를 위한 양질의 일자리 협약'을 채택했다. 우리 정부도 이 총회에서 찬성표를 던졌지만 정작 국회에서는 협약과 관련한 비준안이 제출되지 않아 법 개정이 요원한 상태다.

공공운수노조, 전국가정관리사협회,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 한국돌봄사회 서비스협회, 한국지역자활센터협회, 한국YMCA전국연맹 등 18개단체가 모인 '돌봄노동자법적보호를위한연대'는 5일 서울 광화문광장에 앞에 모여 자신들의 현실에 대해 알리는 캠페인을 벌렸다.

이들은 대선후보들을 향해 "제18대 대통령은 ILO 가사노동자보호협약을 첫 번째 국제협약으로 비준하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내고 "근로기준법과 사회보험법 개정을 통해 가사노동자들의 노동권을 보장하고 국가와 사회가 돌봄 서비스를 공적인 영역으로 이끌어 내달라"고 요구했다.



조인경 기자 ikj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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