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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제2,3의 '최고은'이 고통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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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정종오 기자] 오는 11월18일부터 예술인들을 지원하는 '예술인복지법'이 시행된다. 지난해 1월 지병과 생활고를 이기지 못하고 숨진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 씨의 사건을 계기로 열악한 예술인들을 지원하기 위해 만든 법이다.

예술인지원법이 시행되면 4만 여명의 예술인들이 혜택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지만 현실은 여전히 암담한 상황이다.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것은 물론 예술인들의 '열정과 꿈'을 교묘히 이용하는 사용주에게 피해를 보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예술인 지원뿐만 아니라 구체적 현실을 파악하고, 잘못된 관행부터 바로잡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관행으로 굳어져 있는 현실을 바로잡지 않고는 '제2, 3의 최고은'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자괴감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사례1]열정과 꿈은 현실에 없었다

이제 30대 초반. 그녀는 지방에서 연주가와 작곡가를 꿈꾸며 서울로 올라왔다. 마땅한 일자리가 없어 라이브카페에서 연주를 시작했다. 저녁부터 새벽까지 일하는 생활이 반복됐지만 벌이는 괜찮았다.
그러나 카페 손님들의 노래에 반주를 해주는 생활에서 벗어나 자신의 꿈을 실현하고 싶었다. 늘 그 욕구는 가슴 속에서 꿈틀거렸다. 우연히 카페에 들린 음반회사 대표 A씨를 만났다. 카페에서 그녀의 연주 실력을 지켜본 A 씨는 "그 정도면 우리 회사에서 건반과 작편곡 파트로 일해도 되겠다"며 "이곳에서 한 달에 얼마를 받느냐?"고 물었다. A 씨 회사로 오게 되면 카페에서 받는 만큼 월급을 주겠다고도 약속했다.

또 "실질적인 역량과 경험이 있는 프로듀서 아래서 배우면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는 말에 그녀는 하늘이 준 기회라 생각하며 그 회사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배우면서 꿈을 실현할 수 있겠다는 희망에 부풀었다.

카페 일을 그만두고 음반회사에 첫 출근한 날, A 씨는 "우리 회사는 수습기간이 3개월이다. 수습기간이 끝나면 정식 계약을 할 것"이라는 말을 꺼냈다. 처음 말과 달랐지만 수습기간 동안 성실히 역할을 감당하면 분명 좋은 결과가 있을 거란 믿음으로 기다렸다. 어렵게 자신의 '열정과 꿈'을 실현하는 기회의 순간에 선 그녀는 불공정한 계약이었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오전 9시 또는 오후1시에 출근해 새벽까지 오롯이 혼자서 연주와 작곡을 반복했다.
처음 제시했던 것과는 달리 경험있는 프로듀서도 없었다. 구체적인 견습은 커녕 이런 저런 곡작업을 해보라는 주문만 있을뿐 혼자 감당하고 헤쳐나가야만 했다.

A 씨가 일방적으로 정한 3개월이라는 수습기간 동안 한 푼의 월급도 받지 못했다. 자신의 열정과 꿈 하나만으로 버텼다. 수습기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 A 씨는 그녀와 나이가 비슷한 자녀 두 명을 데려왔다.

A 씨는 "이제부터 패밀리가 되는 의미로 개인레슨을 좀 부탁하자"며 부드럽게 말했다. 내심, 개인레슨이니까 강습료를 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A 씨 자녀들 레슨을 시작했다. 그러나 A 씨로부터 딸과 아들의 개인레슨에 따른 금전적 보상을 받을 수 없었다.

정확히 3개월째 되는 날, 그녀는 생활고를 털어놓으며 "경제적인 이유로 매일 출근하는 건 힘들것 같다.그리고 회사가 추구하는 음악을 만들기엔 역량있는 프로듀서 없이 혼자서 감당하기엔 역부족"이라고 A 씨에게 말했다.

A 씨는 "그러면 다른 곳에서 직장 생활을 하면서 회사에는 왔다갔다 하며 작업하라"는 황당한 제안을 해왔다. 무보수에 아들· 딸 개인레슨까지, 철저하게 농락 당했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그 회사를 떠났다.

같은 회사에 기타리스트로 있는 20대 중반의 남성은 한 달에 100만원도 안되는 보수를 받기로 하고 5년 전속계약을 하게 됐다며 고민 중이라고 그녀에게 털어 놨다고 한다. 그녀의 꿈을 실현하기에는 너무나 무서운 현실이 앞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꿈을 접고 경기도 한 중소도시에서 피아노 레슨을 다니고 있다.

◆[사례2]이게 이 바닥 현실이라고?

보컬인 그녀는 꽤 매력적인 목소리에 듣는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많이 받아왔다. 언더그라운드에서 그녀가 부르는 올드팝이나 재즈는 뭇사람들의 향수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몇몇 기획사 메니지먼트사 관계자들의 눈에도 띄기 시작했다.

'아이돌'과 '걸그룹' 등 젊은 세대들이 대중음악의 대세를 이룬 상황에서 서른을 훌쩍 넘긴 그녀가 설 곳은 많지 않았다. 더구나 알음알음 기업행사를 전문 보컬로 활동하던 그녀는 사실 음반시장에 대해 전혀 무지했다.

우연히 지인을 통해 그녀의 공연장을 찾아 노래를 듣게 된 음반제작사 대표 B 씨는 음반 시장에서 꽤 인지도 있는 인물이었다. B 씨는 이후 음반제작과 관련 지인의 부탁을 받은후, 그녀에게 오리지널 사운드트랙(OST)을 통해 데뷔를 권유했고 동시에 작곡가 C 씨도 그녀에게 소개시켜 줬다.

B 씨는 공중파드라마 음반도 제작한 사람이고 C 씨는 유명 가수들 작곡가로서 인지도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음반 제작과 함께 드라마 오리지널 사운드트랙(OST)를 통해 자신의 꿈을 맘껏 펼칠 수 있다는 희망에 가이드곡을 받아 열심히 연습해서 녹음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어느날 B 씨가 그녀를 찾아왔다. '힘들지 않느냐' '음반녹음은 잘 돼 가느냐'며 말을 빙빙 돌리던 B 씨는 "요즈음 드라마 OST에 들어가려면 시청률 높은 주말 드라마는 2000만 원, 아침 드라마는 1500만 원 정도 찔러줘야 하는 게 관행"이라며, "이 바닥이 원래 이렇다"고 넌지시 말했다.

직접적으로 돈을 달라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에게 에둘러 금품을 요구하는 모습이었다. 결국 드라마 OST에 들어갈 수 있는 꿈은 '금품요구'앞에 산산조각 났다. 그녀는 이런 사실을 작곡가 C 씨에게 이야기했다.

C 씨는 "내가 아는 드라마 외주제작사 선배가 있는데 그쪽에 한번 부탁을 해 보겠다"며 그녀를 다독였다. 며칠 뒤 C 씨는 "드라마 외주제작사에 내건 조건은 내가 쓴 곡이 마음에 들면 내가 선택한 가수를 무조건 쓰는 조건으로 해달라고 했으니 이번에는 아무 걱정말고 작사는 직접 해보라"고 제안했다. 그렇게 그녀가 작사를 하고, C 씨가 작곡한 곡이 만들어졌다.

여러 음악 관계자들 대상으로 시연한 결과 상당히 좋은 반응이 나왔고 작곡가 C 씨도 느낌이 좋다고 해서 마음을 놓고 결과통보만를 기다렸다. 결과가 나오기로 한 이틀 전, C 씨가 술에 취해 전화를 걸어왔다.

C 씨는 "내가 이런 말 용기내어서 한다...당신과 사귀고 싶다. 정식으로 대쉬하는 거다"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채 그녀는 "공적인 관계를 사적으로 이어가고 싶지 않다"라며 단호히 거절했다.

이틀 뒤 심사 결과가 나왔다. 모두 좋다고 했던 그녀의 곡은 채택되지 않았다. 처음 시연했을 때의 좋은 반응과 '정말 좋다'는 주변의 평가는 한 순간에 물거품이 돼 버렸다. 허탈감에 빠졌다. 결국 시간만 낭비하고 음반 제작과 드라마 OST 데뷔의 꿈은 무서운 현실 앞에 무참히 깨졌다.

◆'최고은법'…넘어야 할 산 많아

2011년 1월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 씨가 지병과 생활고를 이기지 못하고 숨졌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회적으로 큰 파장이 일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이에 이른바 '최고은법'으로 불리는 '예술인복지법'을 만들고 오는 11월18일부터 시행에 들어간다.

예술인복지법은 예술인의 직업적 지위와 권리를 법으로 보호하고 예술인의 복지를 지원하기 위한 목적이다. 문화부는 내년에 총 355억 원의 예산을 배정해 예술가들의 창작과 취업 등을 지원할 예정이다.

본격 시행을 앞두고 갈등과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지원받는 예술인의 기준을 어떻게 정할 것인지가 가장 큰 논란이다. 예술인복지법 시행령에는 연극·음악 등의 경우 최근 3년 동안 3편 이상의 공연 출연이나 1회 이상의 연출(음반 출시)로 예술인임을 증명할 수 있도록 했다.

지원받기 위해 이런 조건만 충족시키는 이른바 '꾼'들이 몰려들 것으로 예상되면서 정작 지원받아야 할 대상자는 지원받지 못하는 사례가 있지 않겠느냐는 지적이 있다. 이를 위해 그동안 여러 차례 개최된 공청회에서 '전문가 특별심사위원회'를 도입하자는 의견도 나왔지만 궁극적 해결책은 아니라는 것이 대체적 의견이다.

또 스턴트맨과 공연 스태프 등 일부 예술인이 제한적으로 산재보험에 가입할 수 있게 됐지만 당초 논의됐던 '예술인 고용보험' '사용주 파산 때 국가의 임금 지불' 등은 입법 과정에서 삭제돼 예술인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예술인복지법으로 4만 여명의 예술인이 혜택을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지만 현실은 이보다 더 참담하다는 것이 예술인들의 주장이다.



정종오 기자 ikok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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