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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단상]건축, 정치수단 아닌 시민 삶의 공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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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의 기억이 아련하다. 해충을 없애기 위해 구름처럼 살충제를 내뿜는 차 뒤를 아무것도 모른 채 쫓아다녔다. 많은 기성세대가 함께 겪은 일이다.

요즘도 농촌지역 등에선 어김없이 살충제를 뿌리는 차를 목격할 수 있다. 모기가 많은 곳에선 으레 그렇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 살충제 살포 행위는 일시적으로 모기가 없어진 듯 보이게 하지만 사실상 거의 없애지 못하는 무익한 결과만을 남긴다. 해충을 박멸하려면 다 자란 성충이 아닌 유충을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약효가 없는 것을 알면서도 살충제를 분무할 것을 지시하고 예산을 낭비하게 된다. 전시행정의 대표적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유충을 없애기 위해 하수도에 모기의 천적인 미꾸라지를 풀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건축은 이런 종류의 전시행정에 가장 많이 이용된 분야의 하나다.

건축을 예술의 한 분야로 이해하는 사람이 많다. 특히 건축가들은 자신들이 예술가로서 대우 받길 원한다. 그러나 건축은 '의식주'의 한 축을 담당하는, 인간의 삶에 가장 깊숙이 관여되어 있는 분야다. 이해하기 쉽게 접근하면 건축을 업으로 삼는다는 것은 거미줄과도 같은 여러 법 안에서 움직이는 일이다. 사용자의 안전을 우선시해야 하기에 길고 어려운 수련 과정을 끝낸 후 정부에서 부여하는 자격을 획득해야 건축 일을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건축은 정치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경제 상황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한국에서의 건축은 늘 정치적 이슈의 도구로 이용되거나 경제적 논리에 의해 결정되었다. 주거는 재산 증식을 위한 부동산으로 이해되기 바빴다. 새로운 도시를 만들거나 행정수도를 이전할 것인가 하는 이슈도 그곳에 살게 될 사람의 삶의 질 문제는 배제된 채 정치적 논쟁에 의해 결정되었다.
건축이 정치적 이슈로 사용될 때마다 건설업계와 많은 건축가들은 전문가로서의 현명한 의견을 내놓기보다는 허황된 공약이 빠른 시간 내에 현실화되길 기대하며 거둬들일 수 있는 금전적 이익을 계산하는 데 익숙해 있다.

사회의 각 분야가 선진화되는 것에 비해 선순환의 고리를 만들어내지 못한 건축 분야는 여전히 뒤처져 있다. 이렇다 보니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가와 건축집단을 생산해내지 못하고 있다. 건설업계 역시 모그룹의 지원 없이 독립적으로 국제적 명성을 쌓아가고 있는 전문집단을 찾기 어렵다.

급속한 성장의 그늘에 가려진 어두운 구석들이 산재해 있으나 그럼에도 대한민국의 곳곳에선 진지함과 진정성, 솔직함, 지속성이 평가 받는 세상으로 변화해 가는 징후를 읽어낼 수 있다.

이제 건축, 그리고 그 일을 담당하는 건축가들은 이런 시대 변화에 힘입어 자신의 자리를 찾을 때가 되었다. 건축을 하는 사람들도 새로운 시대에 맞는 근본적인 건축적 가치와 건축가로서의 자세를 가다듬어야 한다. 이제 전문가로서 시민과 도시를 위해 건강한 청사진을 제시하는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또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도시를 만들기 위한 논쟁에 전문가들이 참여해 전문성이 담보된 실천력 있는 대안들이 제안돼야 한다. 돈벌이 수단으로서의 건축이라는 힐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필요충분 조건을 만들어가야 한다.

한편으론 정부와 시민들은 건축이 문화이며, 문화는 역사성과 지역성이란 토양 아래 성숙한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자국의 역량 있는 건축가들을 찾아내고, 보호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건축이 전시행정의 도구와 재산 증식의 수단에서 벗어나 시민들의 삶을 담아내는 본연의 역할을 담당하게 될 때 한국 건축문화는 제자리를 찾아갈 것이다. 또 선조들의 수준 높은 건축문화를 이어받아 가까운 미래에 국제적 경쟁력을 갖춘 건축문화를 창조하게 될 것이다.

이필훈 포스코 A&C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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