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해를 보내며 해를 만나다
강원도 고성으로 떠나는 포구기행-겨울바다 그 비움의 여행
[아시아경제 조용준 기자]'겨울 바다로 가자 메워진 가슴을 열어보자/스치는 바람불면 너의 슬픔~ 같이~하자/너에게 있던 모든 괴로움들은/파도에 던져버려 잊어버리고/허탈한 마음으로 하늘을 보라/너무나 아름다운 곳을/겨울 바다로 그대와 달려가고파'(푸른하늘의 겨울바다)
한장의 달력만을 남겨뒀다. '채우는' 여정보다는 '비우는' 여행이 훨씬 더 잘 어울릴때다. 여행에서의 들뜸이나 기대는 잠시 접어두고 바쁠것 없는 여유가 필요하다.
이즈음에는 어딜 가도 쓸쓸하거나 황량하다. 단풍들은 떠난지 오래고 펑펑 내릴 눈은 아직 멀었다. 순간 화려하게 반짝이는 것들이 다 떠난 지금이야말로 '침잠의 시간' 이다.
이때 가장 안성맞춤한 여행지는 동해안이다. 같은 바다라고는 해도 겨울이라면 동해안이 제격이다. 겨울 폭풍으로 거세진 파도가 갯바위를 두드려대는 해안도로를 느긋하게 달려도 좋고 겨울 바다의 호젓한 백사장을 거닐며 차분히 마음을 내려놓아도 된다. 아니면 들고 나는 배들로 분주한 포구에서 '사람 사는 냄새'를 맡아보는 것도 비움의 여행으로 제격이다.
강원도 고성, 겨울바다의 목적지다. 동해안 최북단 고성의 바다에 서면 차가운 바닷바람 속에서 몸과 마음에 모두 알싸한 박하향이 밸 것만 같다.
예년보다 포근한 초겨울 날씨지만 고성에서 마주한 바다는 번쩍 정신이 들게 하는 그런 청량한 기운이 스며있다.
고성의 겨울바다 여정이라면 포구를 목적지로 잡아 움직이는 편이 좋다. 봉포에서 출발해 아야진항, 공현진항으로 다시 가진항을 지나면 거진, 초도, 대진항이 이어진다. 이 길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포구를 꼽는다면 공현진과 초도항 그리고 대진항이다.
◇공현진항 스뭇개바위 일출 황홀
가을걷이가 끝난 황량한 논과 쓸쓸한 들판을 지나 먼저 공현진항으로 향했다. 이곳에서는 포구보다 북쪽의 방파제와 연결된 스뭇개바위를 먼저 찾아야 한다.
사람들에게 옵바위로 알려져 있는 일출명소다. 사실 진짜 옵바위는 공현진백사장 부근 바다에 떠 있는 작은 바위를 가리킨다.
갯바위가 길게 늘어선 스뭇개바위 사이로 떠오르는 일출은 일찌감치 사진작가들 사이에 정평이 나있다. 동쪽하늘이 붉게 물들자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하나둘 백사장에 나선다.
일출을 마주하는 포인트는 포구 북쪽의 백사장. 이곳에 서서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는 바다와 검은색 바위가 실루엣으로 떠오르는 모습을 대한다면 감탄을 토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때마침 거센 파도와 바람이 스뭇개를 넘나드는 날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겠다. 해 뜨는 시간을 맞추면 좋겠지만 해를 정면으로 마주볼 수 있는 오전 나절에 찾아간다 해도 공현진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초도항 작은 포구에 넘치는 큰 힘
공현진항을 나와 북쪽 초도항으로 길을 잡는다. 초도항은 1960~70년대 모습처럼 소박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지녔다. 포구로 이름을 붙이기 민망할 정도로 작지만 오히려 활기로 넘쳐난다. 포구 안의 바다는 어찌나 맑은지 물 속이 환히 들여다보일 정도다. 방파제 끝에 서면 신라시대 수군기지가 있었다는 거북섬(금구도)도 그림같다.
초도항은 복잡하고 시끄럽고 질퍽거리는 여느 큰 포구들에선 도저히 만날 수 없는 호젓하고 아늑한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일출의 금빛 물결을 따라 항구로 돌아온 뱃사람들이 금싸라기 같은 고기들을 부둣가에 쏟아낸다. 그물가득 잡힌 도루묵들이 펄떡 펄떡 막바지 기운을 토해낸다. 한때 양미리의 천국으로 불렸던 초도항이지만 어획량이 줄면서 양미리잡이를 멈춘 지 몇 해가 됐다. 그 자리를 도루묵이 대신하고 있다.
아침을 가르는 경매 소리와 어부들의 바쁜 손길들로 항구가 반짝 시끌법적하다. 경매장에 모여든 주변 상인들로 어판장은 갖 잡아올린 생선처럼 싱싱하게 살아 움직인다.
싱싱한 생선을 큰 고무그릇에 풀어놓고 행인의 발길을 붙잡는 상인의 손길에서도 삶의 활력이 느껴진다.
◇대진항 최북단에서 부르는 희망 노래
포구 여정의 종작지는 동해안 최북단에 위치한 대진항이다. 고성 최대의 항구인 거진항을 제쳐두고 이곳 대진항을 꼽은 이유는 가장 포구다운 모습을 간직한 곳이기 때문이다.
이른 새벽 대진항 너머 수평선 위로 고기잡이에 나선 배들이 밝힌 불로 바다는 불야성을 이루고 있다. 호흡 척척, 손발 척척 나란히 그물을 걷어올리는 어부의 얼굴에 가득한 웃음소리가 뭍에까지 들리는 듯 하다.
포구에 배를 댄 어선에서 생김새가 심통맞게 생긴 생선이 쏟아져 나온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간다. 바로 '도치'다.
대진항에는 제철 맞은 도치잡이가 한창이다. 마치 올챙이를 뻥튀겨 놓은 듯 이만저만 '불친절'하게 생긴게 아니다. 하지만 못 생겼다고 맛도 없는 것으로 단정하면 오산이다. 일명 '심통이'라고도 부르는 도치는 쫄깃하면서도 질기지 않고 부드럽다.
긴 장화에 고무장갑으로 무장을 한 어부들은 한 손에 단단히 뜰채를 움켜지고 고기를 나르는데 여념이 없고 다른 한쪽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아낙의 손놀림도 점점 바빠진다.
대진항을 나와 국내 최북단 유인 등대인 대진등대를 오른다. 포구가 한 눈에 들어온다. 늘어선 배들이 아침 햇살을 받아 파도에 고개를 끄덕인다. 갈매기들도 정박한 고깃배들 사이로 오가는 날갯짓이 여유롭다.
대진등대는 다른 등대와는 달리 낭만보다는 분단과 적대, 그리고 긴장이 느껴지는 곳이다. 등대는 1973년에 세워졌다. 지금이야 대진에서 북쪽으로 마차진을 넘어 저진까지도 고갯배들이 넘나들지만 유신선포 직후 남북의 갈등이 가장 첨예하던 시절에는 대진 등대가 곧 북방어로한계선의 기준이었다.
대진항에서 나와 동해안 최북단에 위치한 명파해수욕장을 지나 북으로 달리면 통일전망대다. 이곳에 설치된 망원경으로 북녘땅 금강산을 바라보면 국토 분단의 아픔이 가슴에 와닿는다. 맑은 날에만 모습을 드러내는 금강산 비로봉의 절경도 한 폭의 풍경화다.
◇해안도로 드라이브와 화진포
고성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해안도로를 달리는 드라이브의 즐거움이다. 거진항에서 화진포로 이어지는 구간이 바로 그곳. 이 길을 비록 짧지만 파도가 넘실거리는 갯바위를 따라 도로를 달리는 맛은 매혹적이다.
해안도로가 이어지는 화진포의 아름다움도 놓칠 수 없는 곳. 바다와 호수가 만나는 동해의 몇 안되는 석호로 호숫가의 갈대와 수천 마리의 철새, 100년이 넘는 소나무들로 아름다운 풍경을 이루고 있다.
해양박물관에서 시작해 이승만 전 대통령 기념관을 지나 수변을 따라 화진포를 한바퀴 도는 코스는 드라이브나 산책길로도 그만이다.
고성(강원)=글ㆍ사진 조용준기자 jun21@
◇여행메모
▲가는길=서울에서 경춘고속도로를 타고 동홍천에서 나와 44번 국도를 이용해 가다 인제를 지나 미시령터널을 나오면 속초다. 이어 7번국도를 따라 북상하면 고성이다. 속초에서 고성땅을 넘어서면 봉포항이 시작지점이다.
▲먹거리=고성의 대표 어종인 명태는 아직 이르지만 지금은 도루목과 도치가 제철. 도치는 회로 먹거나 지리나 알탕으로 먹으며 그 맛이 일품이다. 거진항의 소영횟집(033-682-1929)은 생대구지리탕으로 유명하고 제비호식당(033-682-1970)은 도치알탕을 맛깔스럽게 끓여낸다. 대진항 금강산회집(033-682-7899) 도루묵찌개와 도치알탕을 잘한다.
▲볼거리=북방식 전통가옥의 원형이 잘 보전되어 있는 왕곡마을은 들러볼만 한다. 또 새해 일출을 조망할 수 있는 청간정, 천학정 등 바닷가 정자와 철새도래지로 잘 알려진 송지호도 찾아볼만 하다.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