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개발연구원 조찬 강연회에서 '나의 삶, 영화 이야기' 강연
올해로 메가폰을 잡은지 50년이 되는 거장 임권택 감독(사진). 반세기의 험난한 한국현대사를 관통해 그가 걸어온 길은 또 하나의 영화사이기도 하다. '열정' 하나로 영화 현장을 지켜온 그가 기업인들 앞에서 101번째 작품을 산고하기까지 질곡진 삶을 회고했다. 지난 1일 인간개발연구원(회장 장만기)이 주최한 조찬 강연(1707회)에서다.
"빨치산 출신 아버지 때문에 연좌제에 시달리던 내가 처음 외국에 나간 것은 ‘증언’(1974년)이었다. 대만에서 열리는 아태영화제에 참석하게 된 것이다. 당시 세계는 가난, 분단, 전쟁, 독재의 나라 한국에 관심이 없었다. 나 역시 평소부터 기회만 되면 일본으로 이민을 가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임 감독의 생각은 이내 바뀌었다. '세계에서 버림을 받은 이 나라'를 그마저 버릴 수 없다는 연민 때문이었다. 이 나라는 그의 뿌리였고, 삶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이전의 그가 아니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는 철학이 자리를 잡았다.
영화 '서편제'는 또 하나의 도전이었다. 판소리를 영화로 찍겠다는 '평생의 꿈'에 이끌려서 시작된 작업이지만 그 깊은 소리의 울림을 화면에 담는다는 것은 큰 부담이었다. 그런데도 일이 술술 풀렸다. 임 감독은 "적절한 장소를 찾지 못해 막막해 할 때도 조금만 이동하면 좋은 장소가 나타났다. 귀신이 데려다준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한국의 소리'를 스크린에 담은 서편제는 국내 최초 100만 관객 돌파의 기록을 세웠다. 자신감을 얻은 그는 ‘춘향뎐’에 이어 ‘취화선’으로 마침내 칸영화제 감독상을 품에 안았다.
임 감독은 "모험과 도전이야말로 지금까지 나를 살아있게 하고, 최근까지 작업을 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자평했다. 이는 ‘임권택은 시행착오의 대가’라는 평론가들의 평가와 맞닿는다. 그는 "영화 인생을 끝낼 때까지 스스로 만족하는 영화는 만들지 못할 것 같다. 그러나 완성을 향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것도 가치 있는 일"이라며 도전하는 삶을 강조했다.
이정일 기자 jay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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