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잃어버린 10년'가운데서 한창 신음할 무렵인 1999년 2월초, 일본은행은 유례없이 단행한 '제로금리'의 실효성에 대해 확신이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버블붕괴로 위기에 처한 경제를 살려야 하지만 실효성이 검증되지 않은 섣부른 정책으로 경제가 한층 더 혼란에 빠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는 지난해 가을 리먼 브러더스발 금융 위기가 전세계를 휩쓸고 간 현재와 거의 유사한 상황. 과거 정치적 압력에 못이겨 일본은행이 모험삼아 도입한 '제로금리'를 현재 시점에서 도입하고 있는 국가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 경제 위기와 정계의 압력


일본은행이 31일 공개한 1999년 상반기 금융정책결정회의 회의록에 따르면 당시 일본 경제는 장기금리 상승·엔화강세·주가폭락에 직면, 일본은행은 정계 등 사방에서 장기국채 매입 확대, 국채 매입 등의 압력을 받았다.

당시 총재는 지난 5월 타계한 하야미 마사루(速水優) 총재. 그와 8명의 정책위원회원들은 1999년 2월 12일 회의에서 장기금리 상승을 최대 리스크로 지적하고, 경기회복을 위한 정부의 정책을 지원할 필요가 있다며 사상 처음으로 '제로금리'를 결정했다.


당시 회의에는 현재 일본 내각부인 경제기획청의 사카이야 다이이치(堺屋太一) 장관 등 4명의 정부 관계자들도 참석했다. 이들이 참석한 것 만으로도 당시 일본은행에 대한 압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 떠밀린 제로금리 결정


의사록에 따르면 당시 위원들 사이에서는 '제로금리'와 '양적완화' 두 가지 안이 도마 위에 올라 팽팽한 논쟁이 벌어졌다. 결정적으로 하야미 총재가 제로금리 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상황은 종료됐다.


그는 "시장에 자금을 충분히 공급하면 장기금리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한다"면서도 "금리인하가 제대로 효과를 발휘할지는 솔직히 자신이 없다"고 밝혔다. 정부 관계자들까지 회의에 참석한 이상, 어떻게든 가시적인 방안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부담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의사록은 제로금리 도입 이후 경제가 다소 회복 기미를 보였다고 밝혔다. 한달 후인 3월 12일, 위원들은 실물경제에 회복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고 논의하고, 같은 달 25일 회의에서는 경제가 정상화함에 따라 금리를 정상화할 시기와 순서를 고려해야 한다는 출구전략이 언급됐다.


◆ 성급한 출구전략론


4월9일 회의에서도 출구전략이 언급되자 하야미 총재는 급기야 같은 달 13일 회의에서 "디플레 우려가 수그러들기 전까지 제로금리 정책을 유지할 것"이라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는 단순한 의사표명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 여파로 장기금리는 급락한 반면 주가는 상승했다고 의사록은 기록하고 있다.


당시 일본은행 심의위원이었던 시노즈카 에이코(篠塚英子)는 31일 블룸버그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당시는 전세계 어떤 중앙은행들도 제로금리를 도입한 곳이 없었기 때문에 일본은행 위원들 사이에서는 어떻게든 눈에 보이는 효과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다"고 털어 놓았다.


◆ 실패로 끝난 모험


다행히 1999년 1분기(1~3월) 국내총생산(GDP)이 전년 동기 대비 7.9% 증가해 예상외 호전을 보였다. 하지만 일본은행 위원들 사이에선 불안감이 가라앉기는커녕 금리인상설이 대두되며 출구전략론이 한층 거세게 오갔다. 결국 2000년 8월 일본의 제로금리 시대는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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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후 일본 경제는 한층 더 악화돼 제로금리를 해제한지 6개월 만에 양적완화책을 다시 도입하기 이르렀고 일본은행은 섣부른 금리정책에 대한 비판을 피하지 못했다.


일본은행은 금융정책결정회의 1개월 후에 의사록 요지를 발표하고 있으며, 발언자 이름과 개별 기업을 언급한 발언을 제외한 모든 발언을 기록한 회의록을 회의 10년 후에 공개하고 있다.

배수경 기자 sue6870@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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