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현대, 김명희 개인전 ‘깊은 시간’
사라진 마을과 이동의 삶…폐교 칠판에 그리다
뉴욕과 춘천을 오간 삶이 회화가 되는 방식

칠판은 남기기 위한 물건이 아니다. 쓰고, 지우고, 다시 쓰기 위해 만들어진 표면이다. 김명희는 그 위에 지워지면 안 되는 것들을 그렸다. 물에 비친 숲, 폐교의 아이들, 전쟁이 지나간 뒤의 얼굴, 오래전 들은 폭탄의 뉴스, 뉴욕과 춘천 사이를 오간 한 사람의 시간이다.

김명희, 전쟁이 지난 후, 2024, 칠판에 오일 파스텔, 115.5 × 176.5 cm. 갤러리현대

김명희, 전쟁이 지난 후, 2024, 칠판에 오일 파스텔, 115.5 × 176.5 cm. 갤러리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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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현대 신관에서 열리고 있는 김명희 개인전 '깊은 시간'의 첫 장면은 조용하다. 흰 벽 위에 검은 숲이 걸려 있다. 정확히는 숲이 아니라 물에 비친 숲이다. 나무는 땅에서 솟지 않고 수면 아래로 내려간다. 하늘은 위에 있지 않고 물속에 있다. 풍경은 뒤집혀 있고, 계절은 반사돼 있다. '차경' 연작 앞에서 관객은 자연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한 번 사라진 뒤 되돌아온 풍경을 본다.


이 전시의 핵심은 회고가 아니다. 김명희가 무엇을 그려왔는가보다, 왜 하필 칠판 위에 그렸는가에 있다. 캔버스는 보존을 약속하지만 칠판은 소거를 전제로 한다. 그림이 오래 남기 위해 선택하는 바탕으로는 불안하다. 그런데 김명희의 작업은 바로 그 불안한 표면에서 시작됐다. 그는 1990년 춘천 내평리의 폐교에서 칠판을 발견했다. 소양강댐 건설로 마을은 수몰됐고, 학교는 비었다. 아이들이 떠난 교실의 칠판은 지식의 도구에서 시간의 유물로 바뀌어 있었다.

그 칠판 위에 작가는 숲을 그렸다. 들풀을 그렸다. 물에 비친 나무를 그렸다. 그림 속 숲은 자연의 재현처럼 보이지만, 조금만 오래 보면 장소의 생존 방식에 가깝다. 물속에 비친 나무는 실제 나무가 아니다. 그러나 완전히 허상도 아니다. 사라진 마을처럼, 떠난 사람처럼, 남아 있으나 본래 자리에 있지 않은 것. 김명희의 풍경은 그런 것들의 자리다.

김명희, 김치 담그는 날 2025, 2025, 칠판에 오일 파스텔, LCD 모니터, 119 × 297.5 cm. 갤러리현대

김명희, 김치 담그는 날 2025, 2025, 칠판에 오일 파스텔, LCD 모니터, 119 × 297.5 cm. 갤러리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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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작가노트에서 "도연명의 사계를 다시 읽었다. 봄은 배꽃이 피는 계절이 아니라 눈 속에서 풀이 솟는 날이고, 여름은 광야가 열리는 날이며, 가을은 울 안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는 시간"이라고 했다. 정착민의 사계가 아니라 이동하는 사람의 사계다. 그래서 그의 숲은 목가적이지 않다. 아름답지만 편안하지 않다. 물 위에 뜬 계절은 늘 흔들리고, 반영된 나무는 언제든 깨질 수 있다.


2층으로 올라가면 칠판의 검은색은 더 무거워진다. '분수놀이'의 아이들은 물줄기 사이를 뛰논다. 환하게 웃는 아이도 있고, 등을 돌린 아이도 있다. 장면만 보면 여름날의 놀이다. 그러나 바탕이 칠판이라는 사실 때문에 이 놀이는 오래된 수업 뒤에 남은 잔상처럼 보인다. 아이들은 지금도 뛰는 듯하지만, 이미 사라진 오후에 속해 있다. 김명희의 오일파스텔은 빛을 붙잡지만, 그 빛은 칠판의 검은 표면 위에서만 살아난다. 밝음은 어둠을 지운 결과가 아니라, 어둠 위에 겨우 올라선 흔적이다.

'전쟁이 지난 후'는 그 흔적을 더 멀리 밀고 간다. 꽃을 든 아이들이 한 줄로 서 있다. 축하처럼도 보이고, 기념사진처럼도 보인다. 그런데 그 위에는 물리학 공식이 흘러간다. 교실 칠판에 적힌 수학이 아니다. 전쟁 이후 세계를 움직인 과학과 폭력의 언어다. 아이들의 얼굴은 환하지 않다. 꽃은 들려 있지만, 꽃이 모든 것을 덮지는 못한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세계는 아이들의 머리 위에 공식을 남긴다.

김명희 작가. 갤러리현대 제공.

김명희 작가. 갤러리현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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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희의 그림이 단순한 향수와 갈라지는 지점이 여기다. 그는 사라진 마을과 아이들을 그리지만, 그것을 잃어버린 고향의 정서로만 붙잡지 않는다. 그가 오래 붙든 문제는 자리에서 밀려나는 삶이다. 뉴욕과 춘천, 한국과 미국, 폐교와 전시장, 집안일과 세계지도, 아이들의 놀이와 전쟁의 공식이 한 화면에 겹치는 이유도 같다. 사람은 한곳에 머무는 것 같지만, 시대는 계속 사람을 옮긴다. 김명희는 그 이동의 흔적을 칠판 위에 쌓았다.


그래서 그의 화면에는 자주 '그림 속 그림'이 있다. 부엌 장면 뒤에 고문서가 있고, 자화상 안에 거울과 지도가 있으며, 정지된 회화 안에 영상이 들어온다. 하나의 화면이 하나의 시간만 품지 않는다. 집안일을 하는 여성의 몸 뒤로 세계지도가 놓이고, 아이들의 군상 위로 전쟁의 공식이 지나간다. 일상은 사소하지 않고, 역사는 멀리 있지 않다. 김명희의 그림에서 둘은 같은 칠판 위에 적힌다.


이때 칠판은 단순한 재료가 아니다. 그것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칠판에는 배움의 시간이 있고, 지워진 문장의 시간이 있고, 아이들이 떠난 뒤의 시간이 있다. 폐교의 칠판이라면 거기에 한 겹이 더해진다. 한 마을이 사라진 시간이다. 김명희는 이 물건 하나로 개인의 생애와 한국 현대사의 압축, 여성의 노동과 세계의 이동을 함께 불러낸다. 거창한 이론보다 정확한 물건 하나가 더 멀리 간다.

김명희 '깊은 시간' 전시 전경 이미지, 갤러리현대.

김명희 '깊은 시간' 전시 전경 이미지, 갤러리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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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제목 '깊은 시간'은 그래서 느린 말이지만 무른 말은 아니다. 이 시간은 고요한 명상의 시간이 아니다. 지워진 뒤에도 남는 시간이다. 물에 비친 나무처럼, 폐교의 칠판처럼, 전쟁 뒤 아이들의 얼굴처럼, 그것은 온전히 사라지지 못하고 다른 표면으로 옮겨간다. 김명희의 그림은 그 옮겨간 것들을 다시 한자리에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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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을 나서고 나면 검은색이 남는다. 보통 검은색은 부재의 색이다. 그러나 김명희의 검은 칠판은 비어 있지 않다. 너무 많이 쓰이고, 너무 많이 지워진 뒤의 색이다. 칠판은 매일 지워지는 물건이다. 김명희는 그 위에서, 지워진 것들이 얼마나 오래 남는지를 그렸다. 전시는 6월 14일 까지.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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