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구구' 집계 논란…모호한 기준에 줄 세우기 급급
은행 기술평가 인력 10여년째 20명대…기업금융 역량 한계
해외는 산업 전문 인력 채용·지분투자 활발
금산분리 등 규제 완화 필요…"투자금융 전환해야"

5대 금융지주가 향후 5년간 500조원이 넘는 대규모 생산적 금융 공급 계획을 내놓았지만 금융권 안팎에서는 '숫자 경쟁'에 매몰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정부의 강력한 드라이브에 은행권이 자금 규모 확대에만 초점을 맞추면서 질보다 양에 치우쳐 생산적 금융의 본래 취지가 훼손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은행이 기업의 성장성과 기술력을 가려내는 '옥석 가리기' 역량을 키우고 정부 역시 은행이 단순 대출을 넘어 지분 투자를 확대할 수 있도록 규제 완화로 뒷받침해야 한다는 조언이 나온다.


생산적 금융 실적, '주먹구구' 집계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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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금융권에 따르면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금융 등 5대 금융지주는 올해 1분기 총 36조3107억원을 생산적 금융으로 공급했다고 집계했다. 이는 기업 여신을 중심으로 그룹 자체 투자가 일부 더해진 수치로, 연간 목표치(80조5000억원)의 절반에 가까운 규모를 단 한 분기 만에 달성한 셈이다.

하지만 실제 기업대출 순증 규모는 15조483억원 수준에 그쳤다. 만기 회수분과 신규 취급분이 함께 반영되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실적과 순증 간 격차는 20조원 이상으로 벌어졌다.


금융권에서는 통일된 기준이 없어 생산적 금융에 '꼬리표'가 없는 데다, 금융당국의 실적 '줄 세우기'까지 겹치며 수치가 부풀려졌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한 시중은행 임원은 "생산적 금융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다 보니 은행별 집계 방식이 제각각"이라며 "일부 은행은 부동산 임대업을 제외한 거의 모든 업종을 포함하거나, 단순 만기 연장 및 금리 인하 대출까지 실적으로 잡는 등 주먹구구식 집계가 이뤄지고 있다"고 꼬집었다.

문제는 이러한 숫자 경쟁이 자금 흐름을 왜곡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생산적 금융의 취지는 담보 중심 가계대출에서 벗어나 혁신·첨단 산업으로 자금을 공급하는 데 있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우량 중소기업 중심의 '나눠먹기식 대출'과 은행 간 과당 경쟁으로 흐르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또 다른 시중은행 관계자는 "실적 달성을 위한 우량 기업 확보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역마진을 감수한 초저금리 대출이 확산하고 있다"며 "2%대 초중반 금리는 일반화됐고, 1%대 후반 금리를 제시하는 사례까지 등장하고 있다"고 전했다.


은행 기술평가 인력 10여년째 '20명대'…기업금융 역량 부족

은행권의 생산적 금융이 수치 경쟁에 머무는 근본 원인으로는 기업금융 역량 부족이 꼽힌다. 그동안 국내 은행들은 담보 대출이나 신용보증기금·기술보증기금의 보증부 대출에 의존해 왔을 뿐, 기업 자체에 대한 신용평가 역량은 충분히 축적하지 못했다. 특히 기업의 기술력을 평가하는 능력은 현저히 취약하다는 평가다.


현재 5대 은행의 기술평가 전문 인력은 각 사 모두 20명대 초반 수준이다. 과거 박근혜 정부 시절 기술금융 활성화를 위해 도입된 기술신용평가(TCB) 체계 운영의 최소 기준인 '20명'에서 10여 년째 사실상 정체된 상태다. 대다수 은행이 외부 기술평가기관에 의존하는 구조도 여전하다. 결국 현재와 같은 인력·심사 구조로는 생산적 금융의 핵심인 기술력·성장성 있는 기업에 대한 정교한 '옥석 가리기'가 어렵다는 지적이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자체 기술 심사를 수행하면 기술평가 전문인력 급여 등 등을 고려해 건당 평균 80만원 이상의 비용이 드는 반면 외부 기관을 활용하면 20만~30만원 수준으로 낮출 수 있다"며 "공급 여신 규모 대비 효율이 낮아 인력을 확대하는 데도 한계가 있다"고 토로했다.


해외는 산업 전문 인력 채용·지분투자 활발…"대출만으로는 한계"

반면 글로벌 주요 은행들은 산업별 전문 인력을 채용해 기업을 정밀 평가하고, 대출뿐 아니라 지분투자를 병행하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미국 JP모건의 경우, 지난해 미 정부가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100억달러 규모의 지분·벤처 투자에 나서기로 하자 국방·에너지·인공지능(AI) 등 27개 첨단 산업에 특화된 금융 전문가 대거 채용에 나섰다. 재무제표라는 수치를 넘어 기술력과 산업 이해도 등 '비재무 요소'를 적극적으로 반영해 자금을 공급하는 방식이다.


투자 방식에서의 격차도 크다. 한국금융연구원에 따르면 2025년 기준 미국 벤처캐피털 투자에서 은행권의 '벤처 대출' 비중은 24.6%에 달한다. 영국 역시 20%대 초반 수준이다. 반면 국내 은행은 1%에도 미치지 못한다. 벤처 대출은 형식상 대출이지만 지분 투자 성격을 함께 지니며 기업의 성장 단계별 자금 지원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일반 대출과 차별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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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은 은행이 기술 심사 역량을 강화하는 동시에 단순 대출 공급을 넘어 '투자금융'을 확대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이를 위해 금산분리 및 위험가중자산(RWA) 규제의 지속적인 완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현행 규제상 은행은 일반 기업 지분을 15% 초과해 보유할 수 없어 투자 확대에 제약이 많다. 금융당국이 최근 비상장 주식에 업력 5년 이상이면 RWA를 기존 400%에서 250%로 낮추고 정책펀드에는 100% 특례를 적용했지만, 이 같은 특례를 벤처 대출 등 다양한 투자금융 영역으로 확대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현재 생산적 금융의 대부분이 대출에 치우쳐 있어 기술 기반 산업을 키우는 데 한계가 있다"며 "은행이 대출과 함께 지분 투자를 병행할 수 있도록 정부는 금산분리와 RWA 규제를 완화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강경훈 동국대 경영학부 교수도 "중소기업에 한정한 은행의 지분 투자 허용 등 제도 개편 없이는 금융그룹 내 협업 기반의 생산적 금융을 구현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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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권의 생산적 금융 전환이 지연될 경우 은행이 금융 시장에서 주도권을 상실할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 김 교수는 "담보 위주의 가계대출 중심의 저위험·저수익 구조로는 결국 IT 기업에 금융 시장을 잠식당할 수 있다"며 "생산적 금융으로의 전환은 단순한 수익 문제가 아니라 은행의 생존이 걸린 문제"라고 강조했다.


권해영 기자 roguehy@asiae.co.kr
문채석 기자 chaeso@asiae.co.kr
이은주 기자 golde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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