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사남 따라 걷는 유배지]나주 다시면서 강진까지…남도 유배길에 새긴 실학의 뿌리
왕사남 열풍 속 다시 찾은 남도 유배지 <1>
정도전과 정약용이 싹트게 한 민본의 가치
절망을 개혁의 설계로 바꾼 창조적 고립의 땅
1,2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이하 왕사남)가 스크린을 넘어 남도의 유배길을 다시 불러내고 있다. 영화 속 주인공이 마주한 고립과 절망의 서사는 수백 년 전 실제 유배길에 올랐던 당대 최고 지성들의 삶과 겹치며 '창조적 고립'이라는 새로운 화두를 던진 민본(民本)과 실용(實用)의 기틀을 닦았던 정도전과 정약용은 조선 시대 한양에서 가장 먼 변방이자 정치적 사형선고의 땅이나 다름없던 광주와 전남으로 유배됐지만, 역설적이게도 국가의 미래를 설계한 '지성의 용광로'의 기틀이 됐다.
"백성이 국가의 근본"…나주 다시면 초막서 싹튼 삼봉의 '혁명'
18일 찾은 전남 나주시 다시면 신숙마을 일대. 1375년(고려 우왕 1년) 삼봉 정도전이 유배 생활을 했던 현장이다. 영산강 물줄기를 끼고 있는 이곳은 현재 고즈넉한 농촌의 모습을 띠고 있으나, 당시 권문세족과의 갈등 끝에 쫓겨온 삼봉에게는 척박한 변방에 불과했다.
당시 삼봉은 중앙 정계에서 밀려난 패배자였다. 그러나 다시면에서의 유배 생활 3년은 그를 '개혁가'에서 '혁명가'로 탈바꿈시킨 결정적 계기가 됐다. 한양의 서재에서 경전을 읽으며 논하던 관념적인 정치는 이곳의 현실 앞에서 무너졌다. 그는 비좁은 초막에서 이름 없는 농부들과 술잔을 기울였고, 부역과 세금에 허덕이는 민초들의 울음소리를 직접 들었다.
"국가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國以民爲本 民以食爲天)." 훗날 조선 건국의 기틀이 된 '민본(民本)' 사상의 정수는 화려한 궁궐이 아닌 나주의 흙바닥에서 완성됐다. 삼봉은 이곳에서 백성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설계했고, 그 설계도는 십수 년 뒤 조선이라는 새로운 국가의 기초가 됐다. 다시면 유허지는 당시 그가 품었던 국가 설계의 꿈이 태동한 실질적인 발원지로 평가받는다.
정 씨 형제의 피눈물 서린 '율정점'…이별의 아픔을 학문으로 승화
나주 도심을 지나 강진으로 향하는 국도를 따라가면 나주시 이창동 부근의 '율정점(栗亭店)' 터에 닿는다. 1801년 신유박해 당시 정약용과 그의 둘째 형 손암 정약전이 유배길에 올라 마지막 밤을 보낸 주막터다.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이곳에서 서로의 손을 맞잡고 밤새 통곡했다. 다음 날 새벽, 형 정약전은 흑산도로 향하는 배를 타기 위해 영산강 물길을 따라 서쪽으로 향했고, 동생 정약용은 강진으로 가는 고갯길을 넘었다. 율정점은 단순히 슬픈 이별의 장소가 아닌, 조선 최고의 지식인 형제가 '실용'과 '현장'이라는 실학의 두 줄기를 완성하기 위해 흩어진 운명의 분기점이었다.
강진 다산초당의 툇마루…18년 고독이 빚어낸 '실용 학문의 정수'
강진군 도암면 만덕산 자락에 자리 잡은 다산초당은 정약용이 유배 기간 18년 중 10년을 머물며 500여 권의 저술을 남긴 곳이다. 초당으로 올라가는 오솔길에는 '뿌리의 길'이라 불리는 나무뿌리들이 지표면 위로 거칠게 얽혀 있다.
다산은 유배 초기 강진 읍내의 작은 주막 '사의재'에서 생활하며 자신을 다잡았다. 이후 초당으로 자리를 옮겨 현지 제자들을 양성하고 본격적인 저술 활동에 매진했다. 이 시기 다산은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 국가 시스템 전반을 개혁하려는 방대한 결과물을 내놓았다. 초당 툇마루 너머로 보이는 강진만은 그가 견뎌낸 인고의 세월과 숭고한 선비 정신을 증명하듯 고요하게 펼쳐져 있다.
"지옥이 아닌 학교였다"…영화 열풍에 재조명되는 유배 문화
최근 영화 '왕사남'의 흥행으로 강진 다산초당과 나주 다시면 유허지에는 평일에도 탐방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현장에서 만난 탐방객 이 모 씨(38)는 "영화 속 주인공이 느꼈을 고립감이 실제 역사적 장소와 겹쳐 보여 이곳을 찾았다"며 "절망의 끝에서 위대한 학문을 꽃피운 선비 정신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말했다.
전남도는 이러한 흐름에 발맞춰 유배 유적을 체계적으로 보존하고, 영화의 감동을 현장에서 느낄 수 있는 인문학 콘텐츠 개발에 속도를 낼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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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도 관계자는 "유배는 과거의 고통이었으나 오늘날 전남에는 더할 나위 없는 문화적 보고가 됐다"며 "유배 문화의 인문학적 가치를 관광 브랜드로 육성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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