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중년 남성의 침묵, 얼굴로 받아들여
"나 자신에게도 수고했다 말한 적 없더라"
"성취 좇다 자기 잃어버리는 사람이 무섭다"

JTBC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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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수야, 행복해라." "고맙다, 김 부장." JTBC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김부장)'에서 김낙수(류승룡)가 대기업 부장이던 과거의 자신과 나누는 대화다. 작품 전반의 정서를 관통하면서 한국 중년 남성의 현실을 응축하고 있다.


단순한 대화를 성취로 끌어올린 힘은 단연 류승룡의 연기다. 김낙수는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속은 무너져 있는 중년이다. 류승룡은 흔들렸다 멈추는 눈빛, 간신히 버티는 호흡, 대사 사이의 미세한 공백으로 억눌린 감정을 표현한다.

절제된 연기는 장면의 깊이를 한층 더한다. 특히 과거 자신에게 사과하는 신에선 참아낸 눈물 끝에서 나오는 담담한 목소리로 한국 중년 남성이 실제로 감정을 털어놓는 순간의 리얼리즘을 구현한다. 류승룡은 "돌이켜보니 나 자신에게 수고했다고 말한 적이 없더라"고 말했다. 배우에게도 뜻밖의 감정선을 열어준 순간이었다.


그는 생활 연기에서도 설득력을 보인다. 대리운전과 세차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장면에서 걸음걸이, 운전대를 잡는 손, 집에 들어올 때 신발을 벗는 작은 동작까지 중년의 피로와 체념을 직접 구현한다. 대사 없이도 살아온 시간이 느껴지는 생활감은 관찰과 경험에서 나오는 역량이다. 감정을 세게 밀어붙이지 않고도 장면의 무게를 만들어낸다.

JTBC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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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극적 디테일이 아니다. 한국의 중년 남성은 오랫동안 실수가 허용되지 않는 조직 문화, 명예퇴직 이후 이어지는 생계 압박, 가족 돌봄까지 혼자 떠안아야 하는 구조 속에서 감정을 억누르며 살아왔다. 자존심은 체면이 아니라 생존 방식이었고, 결국 자기 돌봄을 차단하는 족쇄가 됐다.


현실의 통계도 이를 뒷받침한다. 50대 초반 명예퇴직은 일상화됐으나 재취업 문턱은 높고, 자영업 열 곳 가운데 여덟 곳이 폐업한다. 한국의 노년 빈곤율은 OECD 평균을 웃돌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은 약자로 불리지 않는다. 과거 가부장제의 수혜자로 묶여 있기 때문이다.


'김부장'은 이 세대를 구조적으로 바라본 작품이다. 김낙수가 대리운전과 세차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장면은 통계로는 보이지 않는 중년 남성의 현실을 얼굴로 보여준 순간이다. 류승룡은 "50대 중년 남성을 전면에 세운 작품이라는 점에서 사명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연기에 대한 태도도 달라졌다고 털어놓았다. "가끔은 연기하는 기분만 낸 건 아닐까 싶은 날이 있다"며 집중이 흐트러질 때 깊은 좌절을 느낀다고 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생활을 단정히 유지하고 걷기와 마음 관리 등을 연기의 하나로 받아들였다"고 했다. 몸과 마음이 풍요로워야 진짜 감정이 올라온다는 설명이다.


JTBC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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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영 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남긴 글에서도 변화한 시선이 읽힌다. 류승룡은 고은의 시 '그 꽃'의 "내려올 때 보았네 /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을 인용하며 "성취를 좇다 자기를 잃어버리는 사람이 가장 무섭다"고 적었다. 이어 박노해의 '가면 갈수록', 장석주의 '대추 한 알' 등을 언급하며 목표를 좇다 목적을 잃지 말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가면을 벗을수록 본래 자신이 드러나고, 삶이 농익는 데는 고통과 시간이 필요하다는 내용의 시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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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승룡은 "다시는 못할 만큼 열정과 최선을 다했다"고 말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한 인물을 연기한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중년이 겪어온 침묵과 억눌림을 자신의 얼굴로 받아들였다. '김부장'은 그 얼굴을 통해 한국 사회에 질문을 남긴다. 우리는 언제, 얼마나 늦기 전에, 나 자신에게 수고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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