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프랑스 '메종 두르뜨(Maison Dourthe)'
1840년 설립 보르도 네고시앙·와인하우스
'에썽스' 와인에 대한 집착이 빚어낸 블렌딩의 예술
'뉘메로 엥', 두르뜨 이름 알린 베스트셀러
"일신교(monotheism), 편집광(monomania), 일부일처제(monogamy), 단조로움(monotony). 모노라는 말로 시작해서 좋은 게 없죠. 합일문자(monogram) 허영의 표시죠. 외눈안경(monocle) 마찬가지. 단종재배(monoculture) 유럽 농촌 사멸의 전조예요."
영국의 소설가 줄리언 반스의 소설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에서 화자인 닐은 성인을 대상으로 한 강좌에서 엘리자베스 핀치 교수를 만난다. 거위 배 속에 사료를 채우듯 머릿속에 이런저런 사실을 주입하는 수업은 하지 않을 거라는 핀치 교수는 작은 생각을 흥미로운 것으로 바꿔주는 어른이었고, 닐은 그런 그에게 매료된다.
어느 날 수업에서 핀치 교수는 하나 또는 단일을 의미하는 '모노(mono)'가 들어간 단어를 나열하며 "이 접두사가 인간사에 붙을 때는 시간이 지나고 보면 늘 재앙"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단일 작물 재배를 뜻하는 모노컬처를 예시로 든다. 그는 19~20세기에 걸쳐 와인산업의 기반을 흔들었던 포도나무뿌리진디, 즉 필록세라(Phylloxera)를 언급하며 단종재배는 높은 효율성이라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예상치 못한 위기가 절멸이라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취약성을 지적한다.
아울러 단종재배가 서열화에 용이하다는 점도 꼬집는다. 하나의 종자에서 파생된 작물들은 무수한 공통점을 공유하는 만큼 하나의 잣대로 줄 세우기가 쉽다는 것이다. 반대로 애초에 종자가 다른 것들은 단일 기준으로 상호 간의 관계를 규정하기 어렵다. 차이가 기본값이고 내재된 공통점이 적기 때문에 서로 간에 우열을 가리기는 어렵고 오히려 각자의 고유한 개성에 집중하기에 좋다는 것이다.
핀치 교수의 지적은 오늘날 와인 업계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논쟁거리다. 와인을 분류하는 다양한 방식 가운데 하나가 양조에 사용하는 포도의 품종 수에 따른 구분이다. 단일 품종으로 만드는 '버라이어탈(Varietal)' 와인과 여러 품종을 섞어 만드는 '블렌딩(Blending)' 와인이 바로 이러한 분류법에 따른 구분이다. 와인 종주국 프랑스에서 버라이어탈 와인의 대표 생산지가 부르고뉴(Bourgogne)라면 블렌딩 와인의 대표 생산지는 보르도(Bordeaux)다.
보르도는 단종재배의 정반대편에 서 있는 생산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핀치 교수가 지적한 단종재배의 문제는 포도속(屬, Genus)과 다른 속 간의 이야기이고, 실제 와인 업계에서 다루는 것은 다양한 포도 품종 간의 문제라는 점에선 차이가 있다. 또한 와인 업계 안에서 양쪽의 와인을 두고 우열을 다투지도 않는다. 이는 포도밭이 자리 잡은 지역의 떼루아(Terroir·포도밭을 둘러싼 자연환경의 총체)에 따라 최적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라이어탈이냐 블렌딩이냐는 업계와 애호가 사이에서 영원한 이야깃거리다. 그 안에는 생산자의 철학과 애호가의 취향 그리고 이를 넘어서는 다양한 지향까지도 담겨있기 때문이다.
블렌딩 와인의 기준과 원형, '보르도 블렌드'
보르도는 다양한 블렌딩 와인의 기준과 원형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하나의 생산지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보르도는 카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과 메를로(Merlot), 카베르네 프랑(Cabernet Franc), 말벡(Malbec), 프티 베르도(Petit Verdot) 등 주로 5개 품종을 지역과 생산자에 따라 다양한 비율로 혼합해 와인을 만드는데, 이렇게 보르도의 대표 품종을 혼합해 만든 와인을 '보르도 블렌드(Bordeaux Blend)'라고 부른다. 보르도 블렌드는 보르도가 아닌 다른 지역과 나라에서도 이곳의 품종을 섞어 만든 와인에 그대로 적용되는데, 이는 보르도가 블렌드 와인의 고향이자 중심임을 입증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보르도가 블렌딩 와인의 대명사로 자리 잡게 된 데는 기후의 영향이 크다. 대서양 연안의 멕시코 만류의 영향을 받아 해양성 기후를 띠는 보르도는 전반적으로 온화한 날씨를 보이는데, 특히 여름과 가을이 따뜻하고 일조량이 풍부하다. 하지만 6월 개화와 열매를 형성하는 시기에 날씨 변덕이 심해 수확량의 편차가 있고 곰팡이병의 피해를 받기도 한다. 특히 수확 시기에 내리는 비는 포도의 수분을 끌어올려 풍미가 희석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날씨의 차이, 특히 강우량의 큰 편차는 보르도가 단일 품종에 의존하는 단종재배를 멀리하는 배경이 된다. 보르도 내에서 재배하는 다양한 품종은 개화와 숙성 시기가 다르기 때문에 심각한 서리나 비로 인해 한 해의 농사를 망쳐버리는 참사를 피할 수 있게 한다. 이를테면 하나의 품종에 올인하지 않고 분산투자를 통해 위험을 회피하는 것이다.
180년 이어온 보르도의 블렌드 마스터, 두르뜨
다양한 블렌딩의 미학과 묘미를 선보이는 보르도에서도 주목할 만한 이름이 하나 있는데, 바로 '메종 두르뜨(Maison Dourthe)'다. 1840년 피에르 두르뜨(Pierre Dourthe)에 의해 설립된 메종 두르뜨는 18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보르도 지역의 테루아에 대한 이해와 뛰어난 양조 기술, 최고급 와인 생산 품질 기준 등을 바탕으로 보르도 와인메이킹의 새로운 기준을 정립하며 여타 와인 생산자들의 본보기가 되어온 생산자다.
보르도의 수많은 생산자 가운데 하나였던 메종 두르뜨 변화의 단초를 만들어내기 시작한 건 1979년 '그랑 크뤼 클라세 엉 1855(Grand Cru Classe en 1855)' 와이너리인 '샤토 벨그라브(Chateau Belgrave)'를 인수하면서부터다. 일반적으로 거대 '네고시앙(Negociant)'을 '메종(Maison)'이라고 부르는데, 이전까지 두르뜨는 지역의 다른 포도 재배업자나 와인 생산자로부터 포도와 와인을 대량으로 사들여 자신의 양조장에서 양조하거나 블렌딩, 숙성, 병입 등의 과정을 거쳐 자신의 브랜드로 판매하는 네고시앙이었다.
하지만 샤토 벨그라브를 시작으로 수년에 걸쳐 보르도 내 다양한 와이너리와 부지를 인수하며 자신들이 원하는 품질과 물량의 포도로 대규모의 고품질 블렌딩이 가능한 환경을 마련하게 된다. 무엇보다 와이너리별 세부 부지의 테루아와 최적의 품종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와 실험을 진행했고, 이를 통해 각 포도밭의 토양 타입에 맞는 포도 재배와 관리 방법을 통해 와인의 품질을 눈에 띄게 끌어올릴 수 있게 됐다. 자연스레 업계 내 인지도와 영향력도 확대됐다. 현재 두르뜨는 보르도 지역 내 9개 와이너리를 포함해 총 500헥타르(ha)의 포도밭을 소유하고 있다.
여러 개의 와이너리에 걸쳐 넓은 포도밭을 직접 운영하면서 포도밭 구역별, 와이너리별 교차 블렌딩이 가능해진 두르뜨가 최고의 구획에 있는 최고의 포도를 모아 만든 와인이 '에썽스 드 두르뜨(Essence de Dourthe)'다. '정수(精髓)'라는 뜻을 지닌 에썽스는 오-메독(Haut-Medoc)의 샤토 벨그라브를 비롯해 생테스테프(Saint-Estephe)의 '샤토 르 보스크(Chateau Le Boscq)', 페삭-레오냥(Pessac-Leognan)의 '샤토 라 가르드(Chateau La Garde)', 생테밀리옹 그랑 크뤼(Saint-Emilion Grand Cru)의 '샤토 그랑 바레일 라마젤 피작(Chateau Grand Barrail Lamarzelle Figeac)' 등 4개의 샤토에서 선별한 포도로 만들어진다.
4개 샤토의 가장 뛰어난 14ha의 밭에서 선별한 포도는 수확 후 양조장으로 옮겨져 줄기를 제거하고 분류한 다음 작은 용량의 오크통과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로 옮겨져 발효 전 냉침을 진행한다. 이후 포도의 절대적인 순수성과 테루아의 가장 뛰어난 표현을 얻기 위해 최대한 신중하게 오크통 발효를 진행하고, 새 오크통에서 12개월 동안 숙성한다. 이후 최종 블렌딩을 거쳐 10개월간 다시 숙성을 진행해 완성된다. 두르뜨가 '궁극의 보르도'라고 자평하는 에썽스는 빈티지 당 생산량을 6000병으로 제한하고 있다.
가장 최신 빈티지인 '에썽스 2015'는 카베르네 소비뇽 65%, 메를로 28%, 카베르네 프랑 4%, 프티 베르도 3%의 비중으로 블렌딩됐다. 외관은 깊고 농축된 진홍색으로 잘 익은 신선한 블랙 베리, 블랙 체리, 블랙 커런트 과일과 향신료향의 진한 향과 복합적인 부케가 매력적인 와인이다. 입 안에선 진한 맛과 매끄러운 감촉의 인상적인 풀보디 와인으로, 긴 마무리로 여운을 남기는 균형감과 세련미를 동시에 갖춘 와인이다.
마침내 등장한 애호가를 위한 보르도 '뉘메로 엥'
두르뜨의 정수는 에썽스이지만 두르뜨라는 이름을 전 세계 대중에게도 널리 알린 건 '뉘메로 엥 드 두르뜨(Numero 1 de Dourthe, N°1)'다. 뉘메로 엥은 맛으로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보르도 와인의 경계를 넓히자는 목표를 가지고 시작한 프로젝트였다. 1980년대 보르도의 레드 와인은 품질이나 인지도 면에서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이었지만 화이트 와인은 상황이 달랐다. 두르뜨는 보르도 화이트에 대한 의구심을 해소하고 합리적인 가격의 고품질 드라이 보르도 화이트 와인을 생산하기 위해 보르도 대학 양조학부의 드니 뒤부르디유 교수와 손을 잡는다.
1980년대 보르도 화이트 와인 혁명을 주도한 뒤부르디유 교수는 포도가 제공할 수 있는 모든 잠재력을 추출해 와인에 담아내기 위해 새로운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대표적인 기술이 스킨 콘택트(Skin Contact)다. 스킨 콘택트는 알코올 발효를 개시하기 전 포도를 제경·파쇄한 후 저온 탱크로 옮겨 4~24시간 동안 포도 껍질과 과즙을 접속해주는 기술이다. 이렇게 하면 껍질에 포함돼 있는 향 성분이 추출돼 와인에 과실 풍미와 복합성을 더해주게 된다.
뒤부르디유 교수의 혁신을 토대로 두르트는 1988년 '뉘메로 엥 소비뇽 블랑(Numero 1 Sauvignon Blanc)'을 선보였고, 이렇게 세상에 등장한 뉘메로 엥을 두고 세계적인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는 "마침내 진정한 와인 애호가를 위한 보르도 브랜드가 등장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소비뇽 블랑을 시작으로 뉘메로 엥은 그라브, 메독, 생테밀리옹 등 보르도 세부 지역별 레드와 로제 블렌드 와인으로 라인업을 확대했고, 40년 가까운 기간에 두르뜨의 대표 와인으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구은모 기자 gooeunm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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